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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60 군사연구 제126집 것이다. 단지 임정의 당정고위층이 중국고위 당국자와 연결되어 협력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기선을 제압당한 것은 일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Ⅴ. 결 론 1945년 광복과 함께 정부 수립 이전에 벌써 동 12월 5일 세운 군사 영어학교 (서대문 냉천동 : 군영)는 1946년 5월 1일 국방경비 사관학교(육사 전신)가 개설 될 때까지 1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였다. 이들이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이는 처음에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선발한 뒤 각도에 배치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모 집에 임하여 소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21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으로 군대훈 련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었다.56) 1945년 11월 미 군정청에 등록된 단체는 30여 개가 넘는다. 저마다 건군의 주 역이 되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찼지만 극심한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국방경비대(한국군)를 창설하면서 이들 의 자유 분망한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개인자격으로 지원자를 접수한 것이다. 이들 중 광복군 출신들은 광복과 동시에 귀국할 때 임정과 같이 개인자격이라 는 매우 불합리한 굴레가 덮여져 있어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하여 내심 불평이 적 지 않아 입대를 외면하고 청년단체 활동에 투신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만군이 나 일본군 출신들이 대거 군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창군의 원로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군에 입대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로부터였다.57) 미군정 당국자는 유경험자 중 영어를 해독하고 미국에 호의적인 인물이냐 아니냐 의 여부를 따져서 우선 선발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과 자긍심이 강한 광복군 출신들은 입대 후에도 민족주의적 배타성 때문에 미군과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보였다.58) 군대 내에서 좌우익의 이념 갈등과 대립양상은 1948년 10월 여․순 군 반란사 건과 이어 11월, 12월의 대구 6연대 반란사건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뒤 광복군 출 신 송호성이 자신의 휘하 부대원을 인솔하여 월북한 사건도 이런 일련의 이념갈 주 56) 조선일보, 1946년 1월 12일. 57) 창군의 저자 교원대 교수 한용원의 증언. 58) 육사 교수 온창일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