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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8 군사연구 제126집 경 비호대를 조직하고 이봉훈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에 정식 편성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항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비호대에는 그 후에도 청년들이 합류하여 약 100여 명 규모로 확장하였으며 파 음(播音)선전으로 한적(漢籍) 사병의 탈출을 촉진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중국군과도 합작하여 항쟁을 지속화하였는데 제4차 장사회전에도 동참하 여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51) 장사회전은 9전구사령관 설악장군의 요청으로 비호 대 전원이 동참하였으며, 일본어가 능통한 대원 20여 명을 선발하고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적 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귀대 시 적군 부 대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일본군 대대장 등 5명을 납치해 왔 다.52) 이들은 1946년 6월 채원개 장군의 인솔 하에 부산을 경유 귀국하였다. 임정 지 도자의 호위 임무와 일본군의 무장 해제 등의 공로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소 개한 바 있는 한국광복군 9전구 관병(官兵) 52명과 제1지대 3구대 2, 3분대원 91 명의 명단을 보면 이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이는 광복군 김경화가 당시에 작성 한 문건으로 지금은 작고한 그가 아직도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전자의 52명은 중국 계동에서 후자의 91명은 의춘(宜春)에서 각기 항쟁을 계속하였던 대부분이 국졸 출신의 숨은 애국자로 평가되고 있다.53) 이들의 명단은 필자가 이미 인용하 여 활용한 이 방면 논문이나 저서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 외 충칭의 광복군 토교대의 항일투쟁도 특기할 사항인 것이다. 토교대원은 거의가 독립지사로 포상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비호대원은 거의가 포상에서 제 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의가 작고한 그들의 공로가 광복 이후라는 주장 때문인 것 같아 아쉽다. Ⅳ. 한국군의 모태와 현재적 의미 1940년 9월 17일 충칭에 이미 이동한 임정이 주관하여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의식 있는 발랄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정규무장 단위군대를 광복군이라는 이 주 51) 비호대원 정재윤의 증언(1988. 10. 5. 자택). 52)『비호대 항일투쟁사』, 1990, 42~58쪽. 53)『비호대사』, 1976,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