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page

군사연구 제126집 57 하고 있던 한국광복군은 겨레의 숙원인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 진공작전을 펴서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쟁취할 것을 의미심 장하게 결의하였다. 김구 주석은 정진군의 총지휘관인 이범석에게 국내로 진입하 여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꽂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국내를 3개 지구로 분류하였다. 제1지구(평안․황해․경기 도)대장에 안춘생, 제2지구(충청․전라도)대장에 노태준, 제3지구(함경․강원․경 상도)대장에 노복선이 각기 임명되었다. 이들은 8월 20일 내로 함경도에서 남해까지 주요 항ㆍ포구에 낙하 잠입하도록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48)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이 원자 탄을 일본 두 곳 도시에 투하하여 잿더미로 화하게 하자, 전의를 상실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우리의 이 작전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매우 애석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8․15 민족의 광복을 애석하다고 개탄한 한국민은 없다. 모두가 기쁨과 환희에 용약하였다. 오직 백범만이 그의 회고록에서 8․15의 감격을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탄식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셨도 다.’(사 9:2~3)라는 의미가 이 시기의 우리의 민족적 감격을 그대로 반영한 지적 이라고 할 수 있다. 4. 비호대의 활동 한국청년 20대의 박주대, 이운선 등은 북한지역에서 일본군부대에 징집되어 난 징에 도착하였다가 선편으로 무한 삼진에 가서 보병부대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았 다. 이들은 장사 형산 등지에서 훈련 중 탈출하여 중국유격대와 총격전을 전개 중 잡혔으나 곧 석방되어 당지에 파견 나온 광복군 정치지도원 김경화에 인솔되 어 현지에서 입대하였다고 한다.49) 광복군 소령 김경화는 일명 김귀선이라고도 하였는데 9전구에 근무하면서 최문영, 이병곤 등을 현지에서 광복군에 입대하게 주선하였다고 필자에게 증언한바 있었다. 그러나 9전구와 3전구와의 연락 미비로 이운선, 백진규 등은 광복군으로의 편성이 지연되었다.50) 이들은 일본군의 후방 을 통과하여 의춘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먼저 도착한 이봉훈과 같이 1945년 1월 주 48) 김준엽, 『장정』1, 나남, 1987, 411~3쪽. 49) 광복군 김경화와의 면담 증언(1987. 10. 30 자택). 50) 비호대원 백진규의 증언(1987. 10. 25 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