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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6 군사연구 제126집 에 합류하였다는 이미 작고한 이준승은 ‘중국군은 사기가 엉망이었어요. 군화도 못 신고 짚신을 신고 달렸지요 그것도 중국짚신이었어요’45) 광복군의 특수훈련은 미군 OSS(미 정보전략처)와 합작함으로써 국토수복작전 을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 속에서 소신껏 행사하는 효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중국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여 1945년 4월 4일 한국광복군에 관한 ‘한중양 방상정판법’(8조)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광복군의 특수훈련과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중국에 파견되어있던 미 공군에서도 해외파견공작대의 명성 을 듣고 그곳으로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었다. 총사령부에서는 1944년 12월 엄도 해, 안병무, 안원생, 안우생, 진춘호, 송면수 등 10여 명을 주 중국 미국 대사관에 보내 한인공작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미국 측에서는 이 시기에 곤명 주재 제14항공대에 서젠트와 한인 미 공군 중위 정운수를 파견하여 제1, 2지대를 방문함으로써 OSS훈련의 계획이 성사되었다. 연 합군이 국내에 진공할 때 특수병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1945년 3월 광복군과 미군 사이에 ‘한미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범석(제2지대장 ), 김학규(제 3지대장)가 곤명의 미군 OSS 지휘관과 주 중국 미공군사령관 첸놀트 소장을 만 나 이런 사항(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90명과 22명이 각각 2, 3지 대에서 차출되어 5월부터 3개월 과정으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이들 훈련은 이범 석, 서젠트, 정운수가 제2지대, 김학규, 윔스, 버취가 제3지대를 맡아 훈련에 임하 였다. 그 훈련 내용은 유격용의 특수훈련, 유격대 조직방법, 무전통신기술, 정보수 집, 군사시설 파괴, 암호문 해독 등이었다. 20대 청년들은 ‘신명 바쳐 이 훈련을 시종 진지하고 사명감에 입각 열심히 해냈다’는 것이다.46) 한국광복군은 연합군과 손잡고 대일항전을 수행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전은 국내진공이었다. 비행대까지도 편성해 놓았던 임정의 광복군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이범석 2지대장, 김학규 3지대장 등과 협 의한 뒤 국내 정진군의 특수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47) 전국의 8도를 모두 3지구 로 분류, 책정하여 각기 책임자를 두어 진공작전에 물샐 틈 없는 계획을 실천으 로 전개하게 되어 있었다. 조국의 광복은 줄기차게 계속된 피나는 한국청년의 독 립전쟁의 결과와 피의 대가로 평가해야 한다. 서남아 일대에서 대일 항전에 참가 주 45) 이현희 앞의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이준승 항목 참조. 46) 광복군 김준엽의 증언. 47) 조일문, 한국임시정부항쟁사, 『한국현대문화사대계』 5 고려대,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