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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55 야 한다는 순수한 사명감에서 출발한 한국 청년들의 피 끓는 애국 애족심이 충만 한 거사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3. OSS훈련과 국내 진공작전 한국광복군의 자유로운 작전과 국내진공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에 의해 발목이 잡혀 있는 행동준승(準繩) 9개 조의 철폐만이 우리임시정부 의 진로 모색이 가능해 질수 있었기에 이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이 결사적으로 전 개되었다. 1943년 1월 이후 임정 국무회의에서 그 폐기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성안되어 집행단계로 돌입하였다. 그 대중국교섭대표로 김규식, 조소앙, 박찬익 등이 선임되어 주요 막료인 주가화와 진과부 등을 찾아 격동 책을 활용하게 되었 다. 의정원문서 기록에 보면 조성환 같은 군무부장은 ‘행동준승을 풀어주지 않는 다면 차라리 우리 모두 죽음을 선택하자’면서 격렬성을 보인 일도 있었다. 마침내 1944년 7월 중국의 군사부장(참모총장) 하응흠은 장제스 총통에게 ‘광복 군은 임정에 예속시킴이 정당하며 9개 항의 행동준승은 취소해야 한다’라는 사실 을 보고서로 올리게 조치하였다.41) 동년 9월 동 행동준승을 폐기하겠다는 용의가 있다고 한 뒤 1945년 4월 해제된 것이다. 이후 광복군은 독립전쟁을 위한 전투지역을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다 포함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각지에 우리 군을 파견하게 되었으며 연합군과 어느 곳 에서라도 대일 항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42) 인도나 미얀마 등지에 문응국 등이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시기에 한국인 학병과 기타 청년들이 탈출에 이어 광복군으로의 합류가 빈번히 이루어져 김구 주석이나 동 국무위원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광복군 장준 하, 김준엽에 이어 오건은 ‘나의 양심적인 고백’에서 ‘우리들은 광복군에 귀순하기 로 작정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탈출하자고 했다.---탈출은 성공했다’라고 어려웠 던 당시를 회고하였으며,43) 백정현은 ‘나는 광복군 제2지대에 투신하였다.---후방 공작원으로 뽑혀 활동하였으나 잡혀 베이징 감옥에 갇혔다.--감방을 탈출하였으 나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고--결국 찔려 죽음을 당하였다.’44) 1944년 초에 광복군 주 41) 이현희, 앞의 충칭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하) 참조. 42) 앞의 『의정원문서』, 416~35쪽. 43) 독립신문 충칭판, 1945년 3월 1일. 44) 앞의 자료 1944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