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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4 군사연구 제126집 일단 철수하였다.36) 적진 내에 깊숙이 침투하였던 유해준은 ‘큰 고통 속에서 인 내심을 갖고 공작을 전개하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고충을 털어놓은바 있다.37)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는 대장에 의하여 1942년 2월 시안을 떠나 안휘성 부양 으로 가서 초모공작을 폈다. 이 지대는 지대장이 대원 신송식, 오광심, 서파, 지복 영, 김우전 등을 인솔하고 부양에 도착하여 초모한 결과 51명을 한광반에 편입시 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는 광복군의 9개항의 행동준승이 발표되기 전이라 중국군의 지원이 비교적 수월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동년 이평산이 김학규와 같이 화북일대에서 공작 거점 확보에 진력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제3지 대 본부 비서실장 장조민과 김국주 등이 부양으로 돌아와 초모, 징모 분처가 활 기를 띠고 서주 외곽에서 한국인 초모공작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38) 그 외 고성 봉, 정원찬, 장호강, 조동린, 문수열 등이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광복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한국광복군의 면모를 일신함에 기여하였다. 제5지대와 제3징모 분처는 책임자가 나월환이었다. 그는 시안을 중심으로 활동 하였다. 그는 호종남 사령관에게 부탁하여 중앙전시 간부 훈련단 제4단 내에 한 청반을 개설하여 소정의 군사훈련을 이수할 수 있었다. 이곳을 졸업한 인물로는 문응국, 김천성 등 80여 명에 이르고 있다.39) 그러나 1942년 3월 31일 시안의 5지 대 본부에서 나월환이 암살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40) 제3징모 분처는 김 문호가 주임이었고 이지일, 한도명, 신정숙 등이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4 월 10일경 강서성 상요에 도착하여 안병무의 영접을 받고 간판을 달면서 활동하 였다. 그들의 활동 중 방송국을 찾아 염전사상의 고취, 포로 심문, 반전 전단(삐 라) 살포, 민족정서 함양, 일본군의 귀순 장려 등을 강조하는 초모 공작에 전념하 여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자 징모 분처는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재편되었고 김문호는 제2분대장이 되었다. 1944년부터는 건양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전선과 초모 공작에 적극성을 띠고 활동 하였다. 이런 광복군의 애국적인 활동은 그것이 국외라 해도 또한 여러 가지의 열악한 조건이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오직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달성해 주 36) 광복군 유해준의 자필이력서 참조. 37) 이현희, 앞의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유해준 항목 참조. 38) 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사』, 4. 947쪽 동 6, 224, 409, 420, 550쪽 참조. 39) 상동,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2, 511~2쪽. 40)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5, 9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