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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53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새벽 충칭 가릉빈관에서 중국 측의 허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성립시켰다. 김구 중국지도자 등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광 복군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서 5년의 역사를 개시한 우리의 임정 정규군 인 한국광복군이 군대해산에 이어 계속적인 정통 군역사의 맥을 잇는 의미에서 한국군의 정통을 연결한 것이다. 즉 나라 군대의 정규적인 맥을 잇는 정통 군대 인 광복군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임정의 지도자 김구 등이 일찍부터 염원하던 정규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간섭 하에 창설 운영되었으나 자랑스러운 군의 확보라는 의미에서 자부심 속에 높이 평가되 어야 할 것이다. 광복군은 4개 지대와 토교대, 비호대 등으로 외곽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 뒤 4개 지대는 5지대가 지대장의 피살로 3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제1지대 (지대장 이준식)는 1941년 2월 지대장이 노태준, 안춘생, 이석화, 이영여, 조 인제 등을 인솔하고 산시성 추림현에 가서 염석산 제2전구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의 주선으로 대동 태원 등지의 한국교포들을 찾아 초모, 선전, 첩보 등의 다양한 공작을 펴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 이석화는 중국 중앙 군관학교 출신으로 중국에 안면이 넓어 다양하게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다시 풀려나서 자기 자리를 찾아 공작에 임하였다.32) 이들은 1942년 4월 광 복군이 개편 확장될 때까지 특무공작을 전개하였다.33) 제1지대 간부 안춘생 의 증언을 통해서 그 당시 광복 공작의 어려움이 얼마나 심대하였는가를 짐 작할 수 있다.34) 제2지대(지대장 고운기)는 지대장이 앞장서서 1941년 2월 나태섭, 유해준, 지달 수, 고시복 등을 인솔하고 수원성 포두로 들어가서 중국군 12전구 사령관 부작의 와 유대 속에 초모공작을 폈다. 이들은 하북성의 북경 천진 장가구까지 확대, 적 용하여 종횡으로 누비면서 한국청년들을 상대로 활발히 초모공작과 적정탐색을 병행하였다. 그들은 이런 작전이 곧 우리나라를 찾기 위한 애국활동이라고 평가 하면서 독립투사로서의 자부심 속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친 것이 다.35) 포섭된 청년 중 최준이란 자가 헌병대에 자수하여 대원 유해준이 체포되어 주 32)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779쪽. 33)『대한민국 24년 10월 27일 군무부 군사보고서』, 참조. 34) 이현희, 충칭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하)『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집 1992. 35)『사상정세시찰보고서』 1, 258쪽 동 2, 4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