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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2 군사연구 제126집 특파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임정 지도자 중 조성환, 부단장에 황학수, 단원에 왕중 량(나태섭), 이웅 등을 임명하고 시안에 파견하여 활동 준비단계로 돌입함에 만반 24)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정은 중국 기강에서 연로한 원로 주석 석오 이동녕 주재 하에 내각과 의정원을 개편하였다. 오직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이라 는 지상 목표달성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노력을 집중 투하하는 가운데 오랜 숙원 이던 좌우익의 통합이 결렬되어 우익 3당 요인만이 동참한 것이다. 의정원도 박 찬익 등 18명을 영입하여 참신한 입법 활동을 위한 의회모습을 보여주었다. 치창 의 임정본부와는 별도로 임정이 아직 충칭으로 이동하기 전인 1939년 10월 경 충 칭에서 30여 명 규모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일명 복무대)가 유저우 시기의 청년 공작대원까지 수렴하여 확대 조직 보강되었다. 이 복무대는 하나의 정공대(政工 隊)의 양상을 뗬으며, 기능 발휘를 통해 광복군으로의 조직을 위해 구체화된 것 이다. 그 주요 간부에는 나월환, 김동수, 박기성, 이하유, 한유한, 이재현 등이 포 함되어 있다.29) 동 대장 나월환은 ‘3천만 동포를 구출하고 중국 내에 산재한 혁 명역량을 총 집결하여 무장 단위부대를 결성하자’라고 역설하였으니 그의 평소에 갖고 있던 애국적인 사상과 집념의 요지인 것이다. 조선의열단의 김원봉에 의한 직할 군대인 조선의용대의 선 결성에 크게 자극된 것임은 두 말을 불요한다. 청 년전지공작대의 창설자 중 한부인, 이재현은 ‘시안에 공작대 본부를 둔 우리들은 중국군의 특수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어 대행 산맥 일대에 가서 1940년 초 한국청 년 50~60명을 시안본부로 파견하였지요. 곧 청년전지공작대원이 100여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들이 광복군 결성 당시 기간요원 즉 주요병력이었지요’라고 증언 하였다.30) 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 5지대로 편성되었으니 이는 사실상의 광복군으로 서의 기능과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충칭에서는 이미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일대에 일본군부대로부터 탈출하여 대 기하고 있던 청년이나 흩어져 임정을 찾고 있던 청년들은 광복군 사령부를 찾아 감격스럽게 합류 하였던 것을 당시 학병 탈출병 인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문응 국 등 수십 명의 광복군이 된 애국지사들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31) 주 29)『대공보』, 충칭, 1939년 10월 18일. 30) 앞의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이재현 증언 참조. 31) 김준엽의 『장정』전 4권이나 장준하의 『돌베개』 기타 광복군 출신의 진솔한 여러 건 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회고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