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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51 8개 조의 군사위원회 규정을 제정하여 의정원 상임위원회에 동의를 구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1주일 뒤의 일이어서 긴급히 대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동년 10월 17일 제3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추인하였다. 이동녕 주석이 조 성환군무부장에게 지시하여 성사된 것이다.24) 이를 처리할 담당위원으로 유동열, 지청천, 이복원, 현익철, 안공근, 김학규 6명을 선임하였다. 이의 목적은 광복군의 양성인 중견간부의 집중 육성이었다.25) 임정이 광저우로 이동하는 기간이기도 한 시기인 1938년 7월에는 이건우 등 청 년 60여 명이 한커우에서 조선청년 전시 복무단을 조직하였다. ‘한․중 양 국민은 연합하여 공동의 적 일제를 타도하자’라는 의연한 구호 하에 중국국민들에게도 신뢰와 위안을 주었다. 중일전쟁으로 중국인들이 영토적 상실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기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보가 우리의 정규군을 성립시 키기 위한 전초단계로 계획을 앞당기게 된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광복군 의 결성을 향한 집념의 한걸음 앞장서는 역사로서 민족사적 위업의 중간 결실이 었다.26) 이런 시기에 조선의용대가 홍커우에서 결성되어 ‘광선’ 측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27) 광선측은 유저우로 가서 박영준, 이재현, 유평파, 지달수, 연미당, 오광심, 신순 호, 오희옥, 오희영, 노복선, 민영구, 마초군, 이준식, 김석동 등 약 70여 명이 앞 장서서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이때가 1938년 말경일 것이다.28) 2. 광복군 성립과 활동의 의미 임정 8년 동안 이동시기(1932~40)의 우리 정부는 유저우에 판공처를 정주한 지 6개월 정도 밖에는 체류하지 못하였음으로 이곳에서의 본격적인 괄목할만한 항일 활동은 전개하지 못하였다. 단지 광복군 성립을 위해 의식 있는 청년들이 준비 단계에 있었다고 본다. 충칭에서 청년전지공작대가 재조직 강화되면서 뒤에 광복군으로 정식 편제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임정은 1939년 10월 1일 군사 주 24) 상동 자료, 744쪽. 25) 이현희 주 15의 논문 참조. 26)『소탕보』, 충칭, 1938년 2월 8일 12월 25일 신촉보 충칭, 1938년 8월 20일. 27)『남파 박찬익전기』, 1989, 을유문화사, 244~6쪽 237쪽. 28) 1939년 4월 4일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在유저우 與각기관단체대표유별 기념 촬영’이라는 사진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