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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50 군사연구 제126집 칭따오에는 일본 육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제의 육군 4만 명, 전함 40여 척, 항공기 30여 대가 버티면서 군사력을 과시, 위협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륙 침략을 위해 일제는 1936년 2․26사건을 일으켜 군부가 정권을 장 악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때 장제스도 감금하는 시안(西安)사변을 야기하였다.20) 다음해 7월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8년간의 대륙을 누비 는 노구교 부근에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노산에서 군 수뇌부와 문화 계 대표가 모여 삼민주의교육을 실시 중이었다. 장 총통은 결전의 중대 담화를 발표하고 결사 항전에 온 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21) 이 전쟁은 1년 6개 월 간에 집계한 통계로 볼 때 일제군 70만 명과 중국군 1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큰 규모의 참혹 처절한 피의 전쟁이었다.22) 중국군의 결전태세는 결사적이었다.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한국청년까지 가세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군과의 항전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는 임정이 상하이로 이동한 뒤였으나 조국수호의 의지로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개전 3개월 만에 위협적인 기습으로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철수하여 뒤로 물러났 다. 동년 12월 난징이 함락당하자 무고한 양민 30여 만 명이 학살당하는 천인공 노할 만행이 펼쳐져 아직까지도 그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동시기에 접어든 임정은 중․일전쟁 중 전장(鎭江)에 체류하고 있었다. 중국 으로서는 큰 충격과 타격을 받았으나 임정의 이동녕 주석 등은 지혜로운 대응책 과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국지적인 전쟁이 임정으로서는 유리하 게 작용하여 국면 타개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도의 임 정 시정방침을 보면 1개 사단(아마 1개 연대가 아닐까?)의 병력을 모집하여 기본 대오로 편성하여 하급 장교를 양성 배출하려는 계획 하에 단기간 훈련과정을 거 쳐 충당하려는 계획안을 갖고 있었다. 이에 장교속성소라는 양성소를 설립하여 남북만주의 의용군과 기타 교포에게 알리고,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긴밀 한 조직을 결성하여 임기발동을 목표로 표방하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 었다.23) 이 시기에 이동녕 주석의 지휘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특무공작을 행 할 것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초급 장교 약 200명을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주 20) 이현희, 중경 임정과 한국광복군 연구, (상) 『군사』, 제23호, 1991. 21) 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사』, 6, 1975, 138~141쪽. 22) 『항전 이래 적군 傷亡 통계표』, 1940, 중국군사령부 발행 . 23)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문서』, 1974, 7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