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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49 중국의 7대도시 중의 하나인 난징은 임정의 광복군의 활동 등 무장 항쟁과 인 연이 깊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이곳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장제스 총통 과 담판을 가졌다. 여기서 김구는 장 총통에게 2백만 원의 재정 지원을 요청하며 그것으로 일본군의 교량 등을 파괴하겠다고 필담으로 제의하였다. 그는 군사양성 제의를 수락하여 1934년 초에 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설반을 결성하였으 니 이것이 광복군 성립의 단서라고 말할 수 있다. 광복군이 성립하기 6년 전의 일이었다. 그 정식 명칭은 ‘동 뤄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 군관 훈련반 제17 대’라고 한다. 한인청년들은 1933년 11월부터 중국인과 어울려 훈련을 개시하였고 1934년 2월 한인특별반 92명이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그의 훈련 목표 를 독립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두고 있었다. 그의 운영은 김구가 총지휘하였고 지청천(총교도관), 이범석(학생대장), 오광선(학생반장) 등이 체계적으로 맡았다. 지청천은 3월 1일 군관학교 강당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개최하였는데 그 중 학생 대표 이이흥과 양철산이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독립을 관철하겠다고 결의를 명백 히 천명하였다. 이 한인 특별반은 1935년 4월 9일 졸업하였다. 이들 중 한국독립 군 출신은 청년군사간부특별반(신한독립당 산하)에, 의열단 계열은 민족혁명당으 로, 백범 측은 난징의 한국특무대 독립군에 소속되어 항쟁하였다. 백범은 1934년 12월 말경 한국 특무대 독립군을 만들어 난징 목장영 고강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김구 구락부라 명명하였다. 그의 애국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해 초 학생훈련소를 설치하였으니 그 명칭은 특무대예비훈련소라 하였다. 여기서 훈련 을 받았다. 일제에 쫓기고 있던 백범은 비밀장소에 거주하여 안공근 형제, 박찬 익, 엄항섭 등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기 때 문이다.18) 그러나 그것도 엄격히 표현하면 일제의 압력으로 만족할 만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선 1933년 일제는 열하 등지로 침공을 개시하여 적봉(赤峰), 승덕(承德) 등지를 점령하고 중국을 위협하여 각종 괴뢰기구를 만들 었으니19) 청일전쟁으로 얻은 일본의 권리를 십분 발휘하여 교만을 부렸다. 또한 천진 등 10여개 소를 공동조계로 삼아 이를 거점으로 하여 공관원과 거류민이 항 시 왕래 거주 감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소주 등 30여 개소를 상업지로 활용하고 있어 일제의 중국에 대한 권리행사는 예사롭지 않았다. 관동군이 창춘에 있었고 주 18) 김구, 『백범일지』, 서문당, 1992. 235~9쪽. 19) 예를 들면 북평정무위원회 기동자치정부, 기찰정무위원회, 몽고자치위원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