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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48 군사연구 제126집 결국 임정의 광복정책은 여러 가지 다양성이 있으나 군사정책이 가장 우선적이고 근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경험이 있는 역군을 통해 군사작전을 수 립하며 군인 10만 명 이상을 양성하고 러시아와 중국지역 내에 사관 양성소를 두 어 지속적으로 백년대계를 위하여 무관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건 학정신을 임정에서 재현 실시하겠다는 결전의 의지인 것이다. 청년을 미국 등지 에 파견하여 비행전술을 습득한다는 것으로 이는 노백린 군무총장의 미주 한인비 행사 양성으로 구체화된 것을 지적해 둔다. 청년들을 선발하여 작탄대 같은 돌격 형의 육탄 용사를 양성한다는 집념의 구체화인 것이다.13) 사활을 건 민족의 운명 을 좌우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군사적 측면의 공격이 곧 완전한 광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군무총장 노백린의 명의로 1920년 1월 군사정책이 군무부 포고 제1호로 발포되 고 내무총장 이동녕이 내무부 포고 제1호로 국가 정책을 발포한바 있다. 군무총 장의 언급과 같이 독립전쟁의 완수는 군인의 양성과 군대의 편성이 화급한 사업 임을 천명한바 있다. 육군사관학교라고 한 임시육군무관학교는 상하이 신민리 23 호 군무부내에 있었고 1920년 12월 말 현재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으며14) 4회 졸업생까지 배출하였다고 한다. 내무총장의 포고도 석오가 일찍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신흥강습소 소장)을 역임 한 경력이 있음을 감안해 볼 때 외교적 술사나 실력 양성만을 거듭 강조하였던 것은 아니었다.15) 이 같은 무장독립전쟁론이 실질적 독립혈전의 끈질긴 주의주장과 실천 의지로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즉시 연결되었다고 평가함에 이론이 없는 것이다.16) 그 뒤 1931년 9․18사변으로 일제에 의하여 만주 동삼성일대가 침략당하더 다 음해 1월 말경 상하이가 함락되면서 임정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를 슬기롭게 돌 파한 것이 곧 이봉창의사 의거에17) 이은 윤봉길의사의 홍커우 공원(현 루신공원) 의거였다. 앞선 이봉창의사의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거울삼아 연습에 실 습을 거듭하여 마침내 성공하였고 그것이 곧 장 총통의 뤄양군관학교에서의 한인 반 편성과 무장군인양성의 실현으로 구체화되었다. 주 13) 임정의 임시육군군제 참조. 14) 상하이판 『독립신문』, 1920년 12월 20일. 15) 이현희, 주 4) 참조. 16) 앞의 자료, 109~120쪽. 17) 이현희, 『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 국학 자료원, 1997, 200~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