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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한국광복군 활동의 연구와 현재적 의미 46 군사연구 제126집 면서 임정 직할의 무장군대 창설논의가 법제적으로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다음에 언급할 백범 등이 군대양성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었음을 감 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외로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에 의한 의열단의 조선의용대가 홍커우 에서 창설되었다. 임정계는 아연실색하고 격분, 성토하는 가운데 이미 양성의 전 제단계로 임정 자체를 위한 직할 군대조직에 전념하였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 에 지속적인 의미로서의 유저우, 시안 등지에서 박영준 등 60여명의 한국청년이 광복군의 모체가 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결코 시기적으로 따져 볼 때 광복군이 조선의용대보다 뒤늦게 성립되었 다고 보지 않는다7)는 한 독립지사의 증언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정은 14년간의 항일 투쟁을 성공리에 완수한 상하이시기를 지나 격동의 불확 실한 이동시기 8년을 경험하며 장제스 국민당을 따라 서남천(西南遷)하여 5년간 의 체류기를 맞은 충칭에 정착하였다. 임정 지도자들은 한때 유저우 등지에서 협 조가 잘 안 되고 있는 장 총통을 무작정 따라 가기보다는 독자적 활로 모색을 위 하여 차라리 베트남이나 라오스, 태국 등지로 옮겨보자는 자포자기적 푸념도 있 었다고 한다. 임정의 지도자들이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장제스의 조선의용대 창 설을 힐난 성토하면서 임정을 위한 광복군의 성립을 간청하고 그의 당위성을 설 명하여 마침내 장총통의 정․군 간의 막료 등에 의하여 숙원이던 광복군의 성립 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민족사 소생의 순간이었다. 일찍이 석오에 이어 의정원 의장이 된 손정도 목사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려 면 혈전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안창호 노동국 총판은 ‘군인 양성에 노력한 곳 은 중국 러시아와 국내이며 동포들의 신념의 소산’이라고 광복군 군인 양성의 필 연성과 당위성을 이미 동시에 논증 찬성하였다.8) 임정에서 그 직할 무장 군대를 성립시킨 위업은 1907년 8월 1일 수만 명 규모의 구한국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 제 해산 당한 통한의 역사를 직접 연결하여 국가의 정규군대를 양성하겠다는 대 본영으로서의 임정의 민족사적 의미는9) 그것이 어떤 형태의 보잘 것 없고 미성 숙되었으며 영세하여 규격을 갖추지 못한 군대규모라 해도 구애받지 않았다. 나 주 7) 광복군 이재현의 증언,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현희 편저). 8) 이현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1991. 37쪽. 9) 김락산, 『춘산 이유필소사』, 1943, 미간행, 수필본 필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