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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45 오전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기 21년 전에 벌써 직할 군대인 광복군의 성립의지가 임정의 군사정책 차원에서 정립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무력을 통한 독립이 가 장 현실적이고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곧 서간도의 신흥무관학 교 건학 정신의 연결인 것이다. 빼앗긴 나라의 복귀는 곧 무장투쟁을 우선시해야 함을 적시, 예약한 것이다. 이들은 임정 수립 다음해인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 로 결정을 해 놓고 국민개병제를 역설한바 있다. 모든 독립요원의 무장화가 제창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실시될 것인가는 구체적으로 계획이 성립되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들의 완전한 독립결의와 신념만은 확고부동 한 집념과 의지를 진솔하게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3) 뿐만 아니라 극비 자료에 나 타나고 있듯이 임정 군무부는 동삼성과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도 동 지부를 설 치, 원격 조정운영하고 있었다.4) 이는 1910년대 서간도 일대에 이회영 등이 설립, 운영한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상, 인맥, 정책면에서 계승 유 지했던 것으로 연결, 평가해 볼 수 있다.5) 임정이 수립되자 즉시 이를 연결하여 국민군 편성을 위한 임시육군무관학교가 1920년 3월 20일 임정이 자리잡았던 비 좁은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창립되어 군사 막료들이 전후 몇 차례에 걸쳐 무관 약 100여 명을 양성하여 실전에 배치, 대일전에서 승리한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수차례 게재되어 국내외에서 숙지하고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이해가 혈전의 해이다.………천하 일치하여 국가에 몸을 희생하자.’6) 라고 온 국민의 참여와 혈전을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봉오동과 청산리승첩도 이 들의 협조가 크게 기여된 것이다. 임정이 역부족 중에 대일투쟁전선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장군대의 필요성과 실현성이 제기되지 못한 채 1930년대를 넘겼다. 중국이 일제에 의하여 상하이 등 일부가 만주에 이어 함락당하자 그들도 군대의 양성과 훈련이 무엇보다 독립달성 에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절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봉창에 이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임정을 감격적으로 재 평가한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은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도로 독자적인 무장군대의 창설을 지지하였다. 그것은 마침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주 3) 상하이판 『독립신문』, 1920년 2월 14일. 4)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154~9쪽. 5) 이현희, 신흥무관학교연구,『동양학』, 19, 단국대, 1976. 6) 상하이판 『독립신문』, 1920년 3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