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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역 사 및 역사일반Ⅰ 대한민국 60년 38 군사연구 제126집 취약해 매달 25일을 저축의 날로 정하고, 정부가 공업자금의 조성과 분배를 책임 졌다. 그리하여 한국의 자본주의를 관료자본주의라고도 한다. 1964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거의 매달 빠짐없이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 진흥확 대회의를 개최했다. 국내․외 시장정보를 종합하고, 부정부패와 부처 이기주의를 제거해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정부의 개발에 대한 집념과 도덕성 때문에 한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3년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반대의견이 많았다. 국제경제기구 뿐 아니라 이를 추진해야 하는 경제기획원조차도 회의적이었다. 한국 경제가 중 화학공업을 성공시킬 어떠한 조건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만한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과감하게 시작한 까닭은 무엇인가? 선진국을 따라잡는 catch_up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미군철수에 따른 자주국방을 위해서였다. 이 계획은 ’80년대의 구조조정을 겪는 등 우여곡절을 수반하기는 했지만 매우 성공적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기 계․조선․전기․화학․철강․자동차로 먹고살지 않는가? 철권정치와 중화학공업 발전은 다른 나라에서도 상관관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재벌이 육성되었고, 그 하청업체로서 중․소기업이 따라서 발전되 었다. 재벌이 육성된 것은 정부의 무제한의 금융지원 때문이었다. 그 대신 대기업 은 국가에 방위성금을 내야만 했다. 그리고 인재가 대기업으로 몰려 기업의 경영 능력도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1995년에는 소득수준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1996 년에는 선진국클럽인 OECD에 가입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경제의 자유화가 한 몫을 했다. 그러나 1997년에 외환․금융위기가 찾아와 IMF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받았다. 굴뚝산업은 쇠퇴하고, 반도체․자동차 등 기술집약적인 사업만 호황을 누렸다. 그러면서도 외환시장이 개선되어 환율이 계속 내려가고, 소득수준은 조만간 2만 달러가 될 것이라 한다. Ⅳ. 민주화의 시대 군사독재가 진행되는 동안 민주화 세력이 성장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지 만 이것은 산업화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 세력의 중심은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