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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7 Ⅲ. 산업화의 시대 1960년 5월 16일에 박정희가 주도하는 군사 구테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인 제 3공화국이 성립한 것이다. 군사정권은 ‘기아선상에 있는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부터 제1차 5개년계획(1960~1966)을 수립한다고 했다. 이는 실상 자유당 말기부터 추진해 오던 것이었다. 공산품의 수출 주도형 개발전략이었다. 그리하여 1964년에는 수출 1억 1,910만 달러, 1980년에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품목 은 농․수․광산물이 아니라 면제품․스웨터․신발․가발․합판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들이었다. 일본은 1956년부터 중화학공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한국은 경공업 제품을 수출 할 수밖에 없어서이다. 일본과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1965년에 일본과 국교 를 재개했다. 공업화를 위해 자금이 필요한데다가 미국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냉전체제 하에서 공산군을 막기 위해서는 한일수교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박 정희 대통령이 경제정책에 대해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최신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 수출하는 정책이 들어맞았다. 기술은 선진국의 것을 베 끼거나 로열티를 주고 사왔다. 그리하여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선진국을 따라잡 는 방법이었다. 이른바 catch_up 작전이었다. 한국은 한․일회담의 결과 청구권자금(무상 3억, 유상 3억)을 받아 포항제철․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했다. 일본과의 무역이 트이자 자본재와 중간재의 공급이 안정되어 공산품 수출이 활발해지고, 기술도입이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6․3사태 가 일어나 한일회담을 반대했다. 일본과의 종속관계가 심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남미를 대상으로 제기되었던 종속이론도 유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개발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 세력이 성장했다. 민주화는 비록 학생운동으로 이룩된 것처 럼 보이지만 실상은 산업화의 결과물이었다. 다섯 가지 밖에 없던 업종이 수 십 가지, 수백 가지로 늘어났으니 민주주의 아니고는 의견을 수렴할 수 없어서였다. catch_up 과정에서 환율이 현실화(암시장에서는 3배)되고, 국내의 가격체계도 정 상화되었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철저히 정부 주도로 실시되었다. 은행이나 증권시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