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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한국전쟁(6 ․ 25전쟁) 확대 과정에 관한 연구 362 군사연구 제126집 1951년, 70만의 중국군과 북한군의 4월 공세는 한국전쟁 동안에 공산군이 시도한 “최대의 단일 군사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전선에서의 약간의 영토를 획득 하는데 만족해야 했고, 5월 공세 역시 21개의 중국군 사단과 9개의 북한군 사단 을 투입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는 그들이 당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 한다고 하여도, UN군을 격파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군은 한국전쟁 개입 이후, 반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불패의 신념에 는 동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냉엄한 사실을 인 식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중국은 건국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고, 국내외적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회복하여 만주의 안전이 확보된 이상 체 면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의 “휴전회담”이 태동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 하였다.31) 미국 역시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상, 압록강까지 가는 데는 수십 만 명의 피해를 예상해야 될 뿐더러 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얻을 수 있는 정치 적 효과는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800km에 이르는 한․만국경의 전선에서 중국과 장기간의 전쟁에 빠질 위험이 높고, 지나치게 아시아지역에 몰두하게 되면 무방비나 다름없는 유럽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서구 각국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32) 따라서 미국은 중국군을 남한에서 격퇴하는 것으로서 UN이 당초 목적을 달성 한 것으로 보고, 38선의 북쪽에 방어선을 확보함으로써 명예로운 휴전이 성립되 기를 바라게 되었다.33) 즉, 미국과 중국은 38선 부근에서의 “정체적인 전투상황” 을 통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얻기도 하였지만, 완전한 승리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식하였기 때문에 결국 양측은 휴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휴전의 필요성을 느낀 쌍방이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의 첫 회의34) 를 실시한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될 때까지 무려 2년이라는 장기간 설전 과 혈전이 오고간 이유는 무엇일까? 주 31)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 : 정전』(서울 : 명성출판사, 1986), p.16. 32)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앞의 글, p.16. 33) 사카다 야스요(阪田恭代), 허진녕․이진성 역, “美國의 韓國戰爭 休戰에 관한 基本方針 의 形成 : 中國參戰과 UN軍 總退却을 中心으로”, 『軍史』 제63호, 2007, pp.148~174. 34)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11시 개성 내봉장에서 개최되었다. UN군측에서는 수석 대표 극동 해군사령관 조이(Turner C. Joy)와 4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공산군측에서 는 수석대표 북한군 총참모장 겸 부수상 남일과 4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