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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한국전쟁(6 ․ 25전쟁) 확대 과정에 관한 연구 360 군사연구 제126집 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원자탄은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의 최종적인 작전목표는 북한으로 진격 해 온 UN군을 격퇴시켜 38선을 회복하고 가능하면 전 한반도를 석권하는 것으 로 하였다.26) 하지만 미군은 이러한 모택동의 기본적인 인식과 달리, 미국 중심의 UN군의 병력 투입 규모를 보았을 때,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는 강하였고, 이는 미국이 연 인원 5,720,000명을 파견하고(한반도 인근 해역에 파견된 해군 및 군사요원 등의 숫자까지 포함된 미국 측 집계) 32,93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잘 나타 난다.27) 구체적으로 지상군 사단은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3사 단, 제7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의 8개 육군사단과 해병 1개 사단, 2개 연대전 투단(제5보병 연대전투단, 187공수연대전투단), 그리고 수많은 지원부대를 파병 하여 【표 2】와 같이 전쟁 기간 동안 최고 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한국에 유지 하였고 특히, 미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하에 제5공군과 전략폭격사령부를 중심 으로 북한군과 중국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폭격, 차단폭격과 UN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근접지원 작전을 수행하여, 전쟁기간 중국군에 대 한 가장 큰 피해를 입혔으며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28) 하지만 10월 1일, 모택동은 이러한 미국에 대한 오인을 바탕으로 소련과 북한 으로부터 공식 출병지원 요청을 받은 다음날, 순망치한(脣亡齒寒)․호파당위(戶破 堂危)라는 명분을 내세워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19일, 안동(安東), 장전하구(長甸河口), 집안(輯安)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전장으로 투입되었다. 이 로써 중국군의 개입이 전장의 현실로 구체화되었다.29) 주 26)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 : 중공군의 공세』(서울 : 명성출판사, 1986), p.138. 27) 김명섭, “6․25전쟁과 파병외교 : 미국 외 20개 유엔참전국에 대한 연구성과와 과제”, 『한국전쟁연구학회 학술세미나 : 한국전쟁이 남긴 명제와 과제』(서울 : 한국전쟁연구 학회․조선일보사, 2003), p.70. 28) 김광수, “한국전쟁과 유엔 참전 16개국의 기여”, 『한국전쟁과 유엔 참전국의 역할』 (서울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3), pp.8~9. 29) 온창일, 앞의 글, p.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