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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한국전쟁(6 ․ 25전쟁) 확대 과정에 관한 연구 356 군사연구 제126집 또한 10월 15일, 웨이크 섬 회담에서 트루먼이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맥 아더에게 묻자 그는 “거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첫 달이나 두 번째 달에 개입 했더라면, 그건 매우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개입을 염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주에 있는 중국군 중에서 단지 5만 내지 6만 명이 압록강 을 넘어올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군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국 내에 공군기지를 갖고 있으며, 만약 중국군이 평양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한다면, 그들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맥아더 장군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모든 말을 믿었다”라고 회상한 것을 보면,17) 맥아더의 강한 신념과 자 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맥아더는 중국의 성격을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국가라고 규정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이상할 만큼 멸시하는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잘 교 육되고 훈련된 1950년대의 중국군을 1948년의 사기가 저하된 장개석군과 동등 시하였다.18) 하지만 실상 중국군은 한국전쟁에 개입 이래, 줄곧 병력의 보충 및 교대를 실시하여 중국군 투입 규모가 최대 100만 명에 달하였다.19) 이러한 중 국군은 【표 1】의 “抗美援朝戰爭 中國人民志願軍 戰果統計”와 같이, UN군 병력을 60만 명이상 살상하는 전과를 이루었을 정도로 UN군에 결정적인 피해를 주었다.20) 10월 2일, 맥아더는 이러한 중국군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작전명령 2호”를 작성하여 모든 부대에 북진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미 8군이 주 공으로서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서부축선을 따라 공격하고, 미 10군단 은 원산에 상륙하여 서부축선으로 진격한 미 8군과 연결함으로써 퇴각하는 북한 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정주~함흥~흥남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 뒤 10월 24일, UN군의 북진한계선을 아예 없애는 조치를 취하여 한반도 내에서 의 작전 제한을 철폐하고, UN군을 국경으로 진출토록 하였다. 주 17) 월리엄 맨체스터, 앞의 글, pp.814~815. 18) John. G. Stoessinger, 앞의 글, p.92. 19) 온창일, 앞의 글, pp.1074~1076. 20) 한국전쟁 기간 중국군에 의한 적(UN군) 섬멸을 671,954명으로 파악하고 있어 중국군 에 의한 전과 결과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 왜냐하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를 보면, UN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사망 178,569명, 부상 555,022명, 실종 28,611명, 포로 14158명으로 총 776,360명이다. 이는 중국군뿐만 아니라 북한군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 어 있다. http://www.imhc.mi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