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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55 수동적으로 방관하지 않고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대응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UN군 사령관 맥아더는 소련이 개입할 경우 38선 돌파에 대해 사전 대통 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중국이 38선 이남으로 병력을 투입할 경우에는 중국군을 맞아 군사적으로 대응하되, 어떠한 경우에도 중국과 전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트루먼의 확고한 입장이었다.13) 한편, 중국은 미국의 내부적 판단과 상관없이 UN군 38선 돌파 의도에 매우 민 감한 반응을 보였다. UN군이 서울로 근접하고 있던 1950년 9월 23일, 성명을 통 해 “중국 인민은 항상 조선민족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명확히 한다”라고 밝혔 고, UN군 주력이 38선에 도달한 9월 31일에는 북경 주재 인도 대사 바나카를 통 해 “중국은 미국이 38선을 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라며 경고하였다. 특히 주 은래(周恩來) 외상은 “중국 인민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침략자와의 싸움도 불사한다. 만일 강대국이 인접 국가의 영토에 침입을 했을 경 우에는 중국 인민은 결코 방관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하였다.14) 중국은 이러한 일련의 성명이나 발언들을 통하여 UN군의 38선 돌파를 경고하는 동시에 북한 지역으로 전쟁이 확대되면 참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였다. 그러면 맥아더는 왜 소련과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고려한 미국 내의 신중한 태 도와 UN군 공격에 대한 중국의 강경한 의지를 무시하고, UN군 38선 돌파를 결 심했을까? 맥아더는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능력이나 의도가 없다고 철저히 믿었다. 당시 중국군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들이 탐지된 후에도 맥아더는 이를 위험스레 여기지 않았다. 맥아더는 중국군 1개 연대가 북한의 부전댐을 향 하여 강을 건너오고 있음을 목격한 보고를 무시하였고, 미 10군단이 함흥지역에 서 포획한 중국군 포로들을 통하여 중국군의 동향을 인지하게 되었지만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15) 10월 26일, 중국군이 기습공격을 가하여 UN군 몇 개 연대가 섬멸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월러비 소장은 “중국군이 개입하기에 유리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 중국군 부대가 부대 단위로 한국에 투입되었다는 긍정적인 정보는 없다”라고 단언하였다.16) 주 13)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서울 : 두레출판, 1998), pp.258~260. 14)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上』(서울 : 국방군사연구소, 1995), p.488. 15) 월리엄 맨체스터, 육군사관학교 역, 『미국의 씨이저 맥아더 원수』(서울 : 병학사, 1984), pp.824~825. 16) John. G. Stoessinger, 앞의 글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