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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한국전쟁(6 ․ 25전쟁) 확대 과정에 관한 연구 354 군사연구 제126집 은 개전 이후 전쟁의 주도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였던 미국과 중국의 정책결정자 로 한정하였다.9) Ⅲ. 한국전쟁 확대 과정 1. 맥아더의 38선 돌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세계의 시선은 38선 남쪽에 집중되어 있 었다. UN군이 38선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계 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10) 왜냐하면 전쟁 결과는 냉전이 가시화된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치문제이면서 아시아에서 의 위신과 향후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이다. 38선 돌파에 대한 각국의 입장을 정리하면, 먼저 한국은 한국전쟁의 당사국으 로서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였던 것은 UN군이 38선에서 정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9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독자적 으로 한국군의 북진명령을 하달하였고, 그 결과 동해안의 한국군 3사단과 중부전 선의 한국군 2군단의 3개 사단이 각각 38선을 돌파하였다.11) 반면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군의 개입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 10월 2일에서야 “작전명령 2호”의 북진계획을 통해, 10월 11일 미 8군이 고랑포에서 38선을 돌파 하였다.12) 미국이 북진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법적인 근거나 여 론의 동향이 아니고, 소련과 중공의 개입 가능성이었다. 미국은 38선 돌파에 관한 최종 보고서 “NSC 81/1”을 통해 소련과 중국의 참전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 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소련은 북한이 자신의 영향권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을 주 9) UN 안보리는 한국에 대한 UN군의 통합사령부 설치를 미국에 위임(7. 7 결의)하여, 이 에 의거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맥아더 원수를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중국의 모택동은 총사령관 팽덕회를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 여 10월 19일 압록강으로 도하함으로써, 양국이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의 주도권을 행사 하였다. 10)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 :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개입』(서울 : 명성출판 사, 1986), pp.153~154. 11) 온창일, 『한민족전쟁사』(서울 : 집문당, 2001), pp.779~784. 12) 온창일, 앞의 책, pp.784~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