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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21 더욱 일방적으로 국난극복의 공을 강조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세종대에 신속육전 을 편찬하면서 배향하는 수를 4위로 수정하고, 배향국왕도 태조, 현종, 문종, 원종으로 재선정했다. 배위 수의 조정은 제후국은 5위라는 유가 의 예법에 맞추되 고려를 조선보다 낮추어 5위에서 하나를 감한 것이었다. 그러 나 내용적으로 보면 원육전 의 기준을 다시 채용하여 국방의 공과 내치의 공을 함께 배려하고, 8위에서 덕치와 성품이 지나치게 부족한 왕을 제거한 셈이 되었 다. 그렇다고 해서 국방의 공과 내치의 공을 공정하게 배려한 것은 아니고 어디 까지나 국방의 공이 우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덕치의 공과 국방의 공이 있 지만, 전쟁의 규모가 작았던 성종을 제외하고, 덕치의 업적은 거의 없지만, 대몽 전쟁이라는 고려시대 최대의 전란을 극복한 공으로 원종을 집어넣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국방을 기준으로 배향위를 선정하는 방식은 배향공신의 선정에서는 더 욱 두드러진다. 16위 중 4위는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이지만 태조의 고려 건국 자체가 후삼국의 국난을 극복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12위는 재상, 개혁가, 유학자 등을 모두 배제하고 철저하게 고려의 주요 전쟁과 내전을 기준으 로 선정했다. 단 마지막의 정몽주만은 예외로 정몽주에게는 외침의 극복과 내정, 개혁의 공 등 모든 기준을 다 추가하였다. 이것은 명분적으로는 배향공신의 기준 이 너무 편중된 것을 상쇄하는 것도 있지만, 당시 집권층의 자기 정체성과 정통 성을 정몽주로 상징되는 충과 절의에서 찾으려는 정치적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정몽주의 선정은 예외적 경우이고 전체적으로는 철저하게 국방을 기 준으로 선정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배향인물의 선정은 조선 초기의 위정자들이 국가의 기능 중에서 국 방의 의무가 가장 중요한 것이며, 국가나 국왕, 관료가 백성에게 베푸는 공덕 중 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공덕이 국가방위와 국난극복이라고 인식하고, 또 이를 홍 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시사 와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