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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19 그 주장이 공경하고 복종하여 포로된 사람 수백 명을 돌려주고, 왜구가 세 섬[三島]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명나라 고황제가 세 공을 증가시켜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포 5만 필로 정하자, 정 몽주는 명나라 서울로 가서 증가된 세공을 제감할 것을 주청하였고, 또 호 복을 혁파하고 중국의 제도를 계승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가묘를 세우며 오부 학당과 지방의 향교를 건립하고, 의창을 세우고, 수참을 설치하였습 니다.48) 이전의 모든 인물들은 그들을 선정한 이유로 거의 국난극복의 공만을 언급했 다. 김부식도 삼국사기 편찬 등은 거론하지 않았고, 국정운영이나 내정개혁을 추구한 인물은 전혀 선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인물인 정몽주로 오면 중 흥49)의 공에서 사대교린, 내정개혁 등이 집약되어 있고, 덤으로 왜구 종식의 공 까지 첨가시켰다. 결국 16위의 명단이 국방의 공이라는 기준으로 편중된 것과 왜 구전쟁의 공로자가 빠진 문제를 정몽주를 통해 상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몽주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데는 당시 집권층의 정치적 목적도 있 다고 생각된다. 위의 기사에서 후반부에 열거한 정책들은 모두 조선에서 정책으 로 실현된 것이다. 즉 정몽주는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충과 절의의 표상인 동시에 정책적으로도 자신들의 개혁정책과 연결된다. 태종~세종대의 집권층을 형성한 이색 계열의 유자들은 조선을 개국하는 혁명의 공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 었다. 더욱이 그들은 혁명주도세력을 거세하고 집권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이 정몽주를 내세우게 되었는데, 정몽주를 통해 자신들의 학문적, 정책적 계통을 보편적 가치인 충과 절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50) 이것 이 이 명단에서 정몽주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였다고 생각 된다. 주 48) 단종실록 권4, 단종 즉위년 12월 신축. 49) 정몽주는 공양왕 추대에 찬동했다. 조선 건국자들은 우왕은 공민왕의 친아들이 아니라 고 하여 우왕과 창왕은 위조(僞朝)로 간주했다. 따라서 공양왕의 즉위는 다른 성으로 넘어간 왕씨의 왕좌를 되찾은 것이어서 반정이자 중흥의 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50) 이것이 정몽주가 지니는 중요성으로 정몽주가 조선 유학에서 종주적 위치를 점하고, 나중에 정몽주의 문묘배향 운동까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지두환, 「조선전기 문묘종사 논의 ; 정몽주, 권근을 중심으로」-, 부대 사학 9, 1985, 김영두, 「중중대 문묘종사 논의와 조선 도통의 형성」, 사학연구 85, 200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