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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조선전기의 국방의식 318 군사연구 제126집 원종이나 충렬왕에게 가고, 장수중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안우, 김득배, 이방실은 홍건적의 침공을 막은 3명의 원수(元帥)이다. 이들의 일 화는 조선 초기에도 많이 회자되었던 것 같은데,43) 그 이유는 이 세 장수가 홍건 적을 진압한 공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공민왕에게 살해되는 비운의 장수들이었 기 때문이다.44) 문종~단종 연간에 숭의전의 배향공신을 정하면서 선정자들은 최 영과 같은 무장을 제외하고 이들은 선정했다. 이들의 선정은 국난을 극복한 인물 을 선정한다는 기준에도 맞을 뿐 아니라 이들의 명예를 신원하고 복권시킨다는 의미도 있어서 그만큼 홍보효과도 컸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이 들어간 덕분에 최영, 최무선, 정지와 같이 왜구 격퇴에 공이 있 는 무장들이 빠져버렸다. 특히 정지 같은 경우는 14세기 왜구의 충격이 워낙 컸 던 때문인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대의 평가가 높았다. 태조 3년에 그의 집을 정표해 주었고,45) 후손을 서용하기도 했는데,46) 고려의 무장으로서 이 런 대접을 받은 사람은 최무선과 정지 정도 밖에 없다.47) 이들이 빠짐으로써 왜구 격퇴라는 사건이 이 명단에서 빠지는 문제가 발생했 다. 그러자 그 해법으로 정몽주에게 왜구 격퇴의 공을 몰아주었다. 정몽주는 이 명단에서 가장 특이한 사례이다. 이날 기사에서 정몽주를 배향하는 이유를 다음 과 같이 설명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을 도와서 반정하여 중흥공신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시중 (侍中)에 임명되었으나 끝내는 절의 때문에 죽었습니다. 처음에 명나라가 비로소 일어났을 때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힘써 청하여 가장 먼저 귀부했 으나, 공민왕이 죽고 난 후 이인임 등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함에 정 몽주가 또 그 불가함을 극진히 진계하였습니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를 금할 것을 청하고, 정몽주가 교린의 이해를 극진히 펼치니, 이에 주 43) 용재총화」 3권에는 이방실과 그의 누이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44) 고려사 권40, 공민왕 11년 2월 을사, 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 고려사 에서는 이들 살해의 주범이 공민왕이 아닌 김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 지만 정황을 보면 공민왕도 이 살해를 방조하거나 묵인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45)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9월 갑인. 46)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5월 기해. 47) 세조 2년 양성지는 훈련원을 무학으로 받들고 무장들을 배향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제 시한 명단 중 고려의 장수는 유금필·강감찬·양규·윤관·조충·김취려·김경손·박서·김방 경·안우·김득배·이방실·최영·정지였다.( 세조실록 권2, 세조 2년 3월 정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