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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17 는 점이 부가되었다. 특이한 것은 여진정벌의 공으로 윤관이 들어간 것이다. 국왕을 선정할 때 여진 정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제현과 정도전은 이것은 국난이 아니 라 변경을 개척하고 공을 세우려는 국왕의 욕심이라고 평가절하했었다. 이것이 신하들의 입장이 되자 다시 공으로 바뀌었다. 윤관이 선정된 데는 당시 최고의 가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파평 윤씨가의 영향력도 분명히 작용했다고 생각되는 데, 어찌되었든 왕과 신하의 공적을 평가할 때 같은 사건에 대한 평가방식이 바 뀌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국왕을 선정할 때 대몽전쟁의 비중을 중시해서 군주로서 두드러지지 않는 원종 과 충렬왕을 끼워 넣던 것에 비해 대몽전쟁에서 활약한 박서나 김경손, 김윤후 등의 장수는 선정되지 않았다. 대신에 원종이나 충렬왕의 배향공신도 아닌 김방 경이 몽고의 재침을 막은 공으로 선정되었다. 첨의령 충렬공 김방경은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시켰을 때, 세자가 몽고 에 있으면서 군사를 보내어 임연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몽가독(蒙 哥篤)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김방경으로 하여금 같 이 가게 하였는데, 김방경은 몽고군이 만약 대동강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전국이 놀래어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성지를 받들어 서경에 주둔하면 서 성원만 하고 대동강을 건너지 말 것을 말하였습니다만, 북계의 반민인 최탄(崔坦) 등이 혼란한 기회를 타서 나라를 병탄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 에게 고발하여 말하기를, ‘본국이 장차 관군을 죽이고 제주로 들어가고자 하니, 사냥나간다고 성언하고 대동강을 건너 왕경을 엄습하여 왕족을 사로 잡고 옥백을 모두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몽가독이 장차 그대로 따 르려 했으나, 김방경이 조서를 어기고 대동강을 건너는 것이 불가함을 힘 써 말하여 이를 중지시켰습니다.42) 김방경의 선정 역시 윤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문가인 안동 김씨가의 영향력 을 의심해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선정 기준이 전투에 서 승리를 거둔 장수가 아니라 외침이든 내전이든 국난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을 선정하는 데에 기준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인 듯 하 다. 대몽전쟁의 종결은 군사적 승리를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공이 주 42) 단종실록 권4, 단종 즉위년 12월 신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