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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13 이 고려 말의 행적이 소략하거나 조선 건국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묘사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조선 건국과의 관 련성을 재설정하기 위해서는 공민왕 시대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공민왕은 고려의 멸망을 야기한 주역이었고, 이를 정적이었던 이색 계열 유자들을 억압하는데 이용했다. 반면에 이색 계열의 유자들로서는 자신들의 정책의 뿌리가 공민왕의 개혁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던 것이다. 세종 대에 신속육전 을 편찬하면서 3위는 다시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위 로 재정리 된다. 즉 문종이 다시 들어가고 공민왕이 빠지고 원종이 추가되었다. 문종이 다시 들어간 것은 고려의 국가제도의 정비에 대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세종대의 분위기와도 부합한다. 세종의 시대는 국가체제의 정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문종이 고 려의 문물제도를 정비한 공로가 재평가되었을 것이다. 또한 세종 10년쯤이 되면 관료층과 공민왕의 치세와의 직접적인 연계가 많이 약해져서 공민왕의 치세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세종대에 편찬된 고려사 에서도 공민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사라지 지 않고 남았다. 이 평가들은 유가적 역사관에서 보면 왕으로서는 가장 치명적 인 결함들이다. 더욱이 공민왕이 고려왕조의 멸망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평가 역시 현존 고려사에 살아남아 있다. 일단 이것이 공식적인 역사적 평가로 자리잡은 이상 공민왕을 태조묘의 불천위의 왕으로 선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다.38) 그렇다고 해서 4위의 선정기준이 국왕의 성품과 내정의 업적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외침 극복의 공이 없는 문종을 넣는 대신, 대몽전쟁의 종결 외에는 별다 른 공이 없는 원종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방과 선정을 둘 다 배려하기 는 했지만 외침극복의 공이 더 강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세종 때 선정 한 4위는 국난극복과 내정에 모두 좋은 평가를 받은 태조와 현종, 내정과 국난극 복 중 한 가지 분야에 공이 있는 문종과 원종으로 선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 은 덕치의 업적과 국난극복의 공을 함께 배려한 원육전 8위의 선정기준을 계승 하면서 불미스런 경력이 있거나 불천위의 왕으로 선정하기는 행적이 민망한 혜 주 38) 김인호도 세종대에 공민왕이 빠진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김인호, 위 의 글, 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