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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조선전기의 국방의식 312 군사연구 제126집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민왕의 잔존은 조금 의외이다. 공민왕에 대한 평가에 억 울한 면이 있다고 해도 어떻든 관찬 역사서에서 공민왕에 대한 평가는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민왕의 잔존에는 태종대의 정치적 분위기가 많이 작 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태조대에 개혁을 주도한 정도전, 조준도 공민왕대에 등용된 사대부이지만 공민 왕대에 유배와 숙청의 경험도 함께 했다.35) 반면에 정도전 파를 제거한 태종대의 신 집권층은 대부분 이색계열의 유자들로 공민왕대를 비교적 순탄하게 보냈고, 조선 건국을 전후해서 정도전 파에 의해 유배되는 경험을 겪기도 했다. 정도전이 제거된 후 이들은 고려국사 에서 공민왕대 이후의 이야기가 정도전 에 의해 자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심한 비판을 가했다.36) 그 결과 태조 14년에 고려사 의 재편작업을 다시 하게 하는데, 이 책임자가 원육전 의 개정작업을 주도했던 하륜이었다. 즉 8위를 3위로 축소하는 시기에 정도전 파가 만든 법전, 예제, 역사가 모두 개정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 시대의 이야기에 예민했던 이유 는 공민왕에 대한 평가는 자신들의 행적과 정체성과도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 다. 그것은 고려국사 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불만에서 드러난다. 임금(태종)이 말했다. “만약 이 글과 같다면 전조(前朝)의 말년에 임금에게 직언한 자는 오직 윤소종(尹紹宗) 한 사람뿐이었고, 고을을 잘 다스린 자 는 오직 정운경(鄭云敬)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개국할 때 기밀(機密) 의 일을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 한상덕(韓尙德)이 말했다. “신이 조준에 게 들으니, 또한 말하기를, ‘현릉(玄陵 : 공민왕) 이후의 기사는 모두 잘못 썼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믿을 수 있는 역사는 후세에 보이기 위한 것이 니, 전하가 아시는 바대로 개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37) 위 기록에서 말한 윤소종은 조준 파에 속한 인물이었고, 정운경은 정도전의 부 친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고려국사 에서 이색을 포함해서 이색 계열의 유자들 주 35) 조준은 청년시절에 공민왕이 우연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중용했다.( 고려사 권118, 열전31 조준) 그러나 신돈집권기에 축출되어 12년 간 야인생활을 했다. 정도전은 공 민왕 사후에 유배되지만 공민왕대에도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고, 우왕 즉위 후 바로 유배된 것도 그간의 갈등이 축적된 결과였다고 보아야 한다. 36)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5월 임오., 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경자. 37)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5월 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