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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11 그렇다면 공민왕이 8위에 선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공민왕을 선정한 이유 를 태종 13년 11월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민왕은 명나라에 사대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므로 동방에 공이 있으니 의리상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명에 대한 사대관계의 수립이 선정의 이유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할 문구가 명나라에 사대해서 민생을 안정시켰 다는 부분이다. 당시 친명반원 정책은 민생안정과는 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역사 적으로 보면 공민왕의 치세는 최악의 전란의 시대였다. 홍건적의 침공으로 개경 이 함락되었고, 왜구의 침공이 극성하던 시기다. 고려의 전쟁사를 보면 개경이 함 락된 적이 거란의 침공, 몽골침공, 홍건적의 침공 때였다. 앞의 두 전쟁을 극복한 군주는 8위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충렬왕은 원나라와의 사대관계 수립을 통해 대 몽전쟁을 종식시킨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공민왕의 이 기사도 그와 같은 패턴을 사용하여 국난극복의 공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 공민왕의 사적을 보아도 공민왕은 내치와 국난극복에 모두 공이 있거나 내치나 국왕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지만( 고려사 의 평가가 왜곡이 아닌 진정한 평가였다고 할 경우) 국난극복의 공은 있는 두 사례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따라서 공민왕의 선정 이유 역시 국난극복이라는 공적이 중요 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4위의 재선정과 선정기준의 변화 원육전 의 8위는 태종~세종 때를 거치면서 태조, 현종, 공민왕의 3위설이 대 두했다가 세종 11년의 신속육전 에서 태조, 현종, 문종, 원종으로 확정되어 경 국대전 으로 계승된다. 3위로 축소하면서 8위 중 혜종, 충렬왕 등 국왕의 자질이나 업적에 심각한 결 격사항이 있는 왕들이 제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국난극복의 공이 없는 예종이 나 충선왕은 선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평가가 비교적 깨끗하지만 외침 극복의 경 력이 없는 문종이 빠지고 내정에서는 가혹한 평가가 많은 공민왕이 잔존했다. 즉 3위로 가면서 국난극복의 비중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