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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군사 사 및 기타 Ⅰ 조선전기의 국방의식 310 군사연구 제126집 마지막으로 공민왕을 살펴보겠다. 공민왕의 선정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은 당시 고려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고, 그가 시도한 개혁정책은 충선왕의 개혁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조선의 개혁정책과 연 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제와 학교제의 개혁, 억불정책, 관료인사제도 등을 들 수 있다. 더욱이 조선 초기 국정과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 중 대부분은 공민왕 의 성균관 및 과거제 부흥과 신진사대부의 등용정책에 의해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좋은 평가는 역사학계에 의해 학술적으 로 재조명을 받은 결과이다. 공민왕에 대한 당대 사신의 평가는 의외로 가혹하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왕이 되기 전에는 총명하고 인자해서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했고, 왕이 되어서도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그의 정치는 폭정과 난정에 가깝게 묘사한다. 훈신과 현자를 내쫓거나 죽이고,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사고, 완악한 소년을 좋아해서 음란한 짓을 마구 하였다. 말년에는 포악해지고 기탄이 극성스러워 술을 취하기를 때 없이 하고, 좌우사람을 때리기까지 했다. 또한 후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을 삼 아 장차 뒤를 이으려 하다가 외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비 밀히 신임하는 신하로 하여금 후궁을 욕보이게 하고서 그가 임신하게 되 자 그 사람을 죽여 말이 나지 않게 하려 했다. 패란이 이러했으니 망하지 않으려 한들 될 수 있었겠는가? 공민왕에 대한 이 같은 심한 평가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포함되 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찬 이외에도 공민왕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이제현이 공민왕에게 재정규모를 줄이고 검약 할 것을 여러 번 간했으나 그 이야기는 결코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 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몽진한 상황에서도 홍언박이 검약을 건의하자 대답 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33) 또 신돈의 전기에서 공민왕의 성격을 다 음과 같이 평가했다.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 였다.34) 주 33) 고려사 권111, 열전24, 홍언박. 34)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