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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09 혜종과 원종, 충렬왕의 경우를 보면 국왕으로서의 행동이나 선정에서는 거의 낙제점을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선정한 이유는 오직 후백제 정벌과 대 몽전정의 종결이다. 물론 대몽전쟁의 종결이 원나라를 군사적으로 격퇴한 것이 아니라 강화와 사대관계의 수립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당시의 시 대상황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여주 듯이 사대관계의 수립과 원황실과의 태평성대를 되찾게 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왕들을 선정한 이유는 내정의 공보다는 전쟁이나 국난극복이라 는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고려의 국왕 중에서 국왕으로서의 자질이나 내정의 공로로 보면 예종이나 충선왕이 더욱 뛰어나다. 예종에 대한 평가는 “문학을 좋아하고, 선비를 예로 대 하고,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다. 왕이 되어서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염려하며 부지런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렸다”는 것이었다. 충선왕에 대한 평가는 특히 그의 부친인 충렬왕과 대비된다. 충선왕은 즉위 후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고, 정도전, 조준 파의 개혁정책 중에는 충선왕의 개혁과 연결되는 내용도 많았다. 정도전의 충선왕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성품이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다. … 즉위하여서는 상국 (원)의 제도를 피하여 벼슬 명칭을 고치고 바꾸었으니 사대하기를 예로써 한 것이요, 전제와 부세제도를 바로잡고, 염법을 세웠으니 근본 되는 바를 안 것이다. 정도전은 충선왕이 왕위를 세자에게 넘기고 연경으로 가는 바람에 정치가 불안 해지고, 부자간에 정쟁이 발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충 선왕에 대한 평가가 훨씬 후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8위의 국왕을 선정할 때 혹시 시대적 안배를 했다고 하더라도 국왕의 자질로 보면 충렬왕보다는 충선왕이 들어 가는 것이 누가 보아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정작 8위에는 충선왕이 빠지고 충렬 왕이 들어갔다. 이것은 8위의 선정에서 외침의 격퇴와 국난극복이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32) 주 32) 예종의 치세에 “여진정벌”이 있었다. 만약 국난극복이 내치의 업적보다 우월하는 기준이었다 면 왜 이 사건은 고려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이제현이나 정도전이 여진정벌은 국난극복이 아닌 국경개척으로 이해하고 그 원인을 국왕이 변방에서 공을 세우 기를 바라는 행동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여진정벌이 공세적 전쟁이었으므로 국난을 극복하고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했다는 포맷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