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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307 축소할 때 현종은 남겨두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조 이하 7위 안에서 현종은 요나라의 외적을 능히 몰아내어 백성의 피 해를 없앴습니다.27) 최충과 이제현도 고려사 에 수록한 사찬에서 현종을 극찬했는데, 최충은 주나 라의 성왕, 강왕, 한나라의 문제와 경제에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고 했고, 이제현 은 “나는 현종에게서 어떠한 잘못도 찾을 수 없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남겼다.28) 현종이 이처럼 일관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진관 사로 쫓겨나 살면서 몇 번이고 암살의 고비를 넘겼고, 거란 전쟁으로 개경을 떠 나 나주로 피난가면서 겪었던 드라마틱한 삶과 일화들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더욱이 그는 긴 전쟁 중에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성종도 사신의 평가가 칭찬일변도인 왕이다. 이제현은 종묘를 세우고, 섬학전을 만들어 선비를 양성하고, 수령을 격려하고 백성을 잘 돌보고, 죄수를 용서하는 등 선치의 공과 거란의 1차 침공을 막아낸 것, 세자를 일찍 세워 혼란하던 정치를 안정시켰다는 것을 열거하였다.29) 정도전도 이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 를 보면 성종은 내정에서의 덕치와 거란 침공의 격퇴가 주요 공적이라고 하겠다. 문종은 ‘문’이라는 묘호가 말해주듯이 선치를 하고,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한 공을 참작한 것이 분명하다. 고려사 에서 대부분의 제도는 문종조의 제도정비를 고려 국가체제의 정점이자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다만 이제현과 정도전의 평 가에서는 제도정비의 공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학문을 좋아하고, 인재를 고루 등 용한 것 등 통치행위만을 칭찬하고 있는데, 그 기저에는 이 같은 제도정비의 공 이 깔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숭상하고 사찰을 널리 건축한 것을 비판해서 양무제에 비교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왕들은 고려사 에서 가장 평가가 뛰어난 왕들이어서 선정에 이의가 있 을 수가 없다. 내용적으로 보면 현종과 성종은 국난극복과 선정 모두가 공덕으로 강조되었고, 문종은 선정부분만 강조되었다. 태조는 왕조개창의 공을 안고 있어서 더 이상의 근거가 필요 없다. 하지만 태조의 왕조 개창에는 후삼국의 혼란을 극 복하고 통일을 이루었다는 국난극복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하겠다. 주 27) 태종실록 권26, 태종 13년 11월 경진. 28) 고려사 권5, 세가 5, 현종 22년. 29) 고려사 권3, 성종 16년, 이제현의 사찬. 이 평가는 정도전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