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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러 ․ 일전쟁기 러시아군과 한인과의 관계 연구 244 군사연구 제126집 보고를 받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권고를 받고 러시아는 일본과 포츠머스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 평화조약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에 지도 감독이라는 우월권을 주게 되고 특히 단서 조항에서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주권침해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 와 조약으로 할 수 있다는 항목을 합의해 줌으로써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밤 에 강제로 보호조약 체결을 요구해 거부하자 무력으로 국새와 관인을 약탈해 미 리 준비해온 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에 1905년 11월 18일 새벽에야 스스로 날인 하고 고종황제의 서명을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끝까지 거부하여 사실상 효력이 없 는 불법이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만주의 이권은 물론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양분하여 남부 사할린 등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강대국이 격렬한 대결을 하게 된 중심에는 한반도가 있었다. 본 연구 에서 살펴 보았듯이 일본은 영광된 고립을 주장하던 영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어 영일동맹을 1902년 체결하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해 한반도에서 의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마침내 일 본은 영국과 미국을 배경 삼아 러시아와 운명을 건 대결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에서 중심에 있었다. 이에 고종 은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해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가려고 했으나 국력이 약 하고 외교력의 부재로 러시아를 제외한 세계열강은 이를 인정을 하지 않고 일본 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게 된다.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을 점령하여 고종을 감금 상태에 두고,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 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대한제국 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고종황제는 서명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위 협에 대한제국 내각은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 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이렇듯 본 고에서는 먼저 국제관계 속에서의 일본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이 두 나라에 대응하는 대한제국의 노력을 정리함으로써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이 차지하는 의미를 살펴 보았다. 물론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한반도는 러일전쟁에서 중요하다. 러일전쟁의 시작 을 여순항 기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문헌도 아직 많이 있으나 서두에서 밝혔듯이 대한제국의 제물포에서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음을 재강조한다. 또한 일본군의 주요 진격로는 대한제국에 상륙하여 서울, 평양, 의주를 거친 서북지방이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