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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특 집 Ⅰ 육군 60년발전사 발간과 활용방안 24 군사연구 제126집 창설되었다.4) 제3군사령부는 제1․5․6군단을 포함한 49개 부대를 예속받아 중․ 서부 전방방어지역을 인수하였으며, 서해안 및 인천지역의 대침투작전태세를 강 화하였다. 1961년 이후 전투력 증강 및 정비에 역량을 투입한 우리 육군은 1965년 10월에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부대)을, 1966년 9월에는 제9사단(백마부대)을 월남에 파병하여 파월병력이 5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 은 창군 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이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공동 방어 전선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월남 파병을 계기로 주월 한국 군은 장비를 점차 신형장비로 교체 및 보강하는 장비 현대화계획을 수립하여, M-16 소총, 81mm 박격포, 4.2인치 박격포, M-60 기관총, 각종 차량, 무전기, 항 공기 및 헬리콥터, M113 병력수송용 장갑차등 등의 장비를 현대화하게 되었으며 독자적인 전술교리 발전에 주력하여 많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5. 자주국방 기반 조성기(1972∼1980)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미․소 양극체제는 중국의 부상으로 다원 화 체제로 전환된다. 월남전으로 인해 내부갈등과 한계에 직면한 미국은 중국ㆍ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분담토록 하여 아시아 주둔 미군을 감축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5) 이러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변화는 한국의 안보상황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1971년 3월 미 제7사단을 휴전선에서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어 왔던 미국의 무상원조가 점차 감소하여 1975년부 터 차관형식으로 바뀜으로써 그동안 대미 의존에 치중하던 것에서 탈피, 자주국 방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동안 대결 구도에 있던 남북관계는 남북적십자회담과 7ㆍ4공동성명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등 남북대화의 진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듯하 였다. 그러나 1974년도에 최초 땅굴이 75ㆍ78년도에 제2ㆍ3땅굴이 계속 발견되어 한국을 경악케 하였고, 수많은 침투도발과 함께 1976년 8월에는 8ㆍ18 판문점 도 주 4) 국방군사연구소, 건군 50년사 , 1998년, 307∼308쪽. 5) 국방군사연구소, 1945~1994 국방정책변천사 , 1995, 173~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