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page

군사연구 제126집 237 는 김원교 대장은 이미 6월에 러시아군을 향해 발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 고 부대원과 함께 러시아군편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외에도 많은 지휘관 들이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고종의 밀지는 러시아군에 대항하지 말고 러시아군 에 식량을 제공하고 길을 안내 해주라는 것이었다. 이 때 제7 동부시베리아 보병 연대 루디코프스키(Рудковский) 대위는 대한제국 법부대신과 농상공대신 명의 로 “모든 백성은 위선자 왜놈들에게 드디어 복수할 때가 왔으니 화급히 무기를 들라”라는 격문이 돌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92) 러시아 학교 유학생들은 대한제 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는 러시아가 승리해야 조국이 독립될 것으로 믿고 교사 비류코프를 따라 전쟁에 참가하여 기병부대와 함께 정찰 임무 혹은 첩보수집을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제2, 제3 태평양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로 가던 중 독도 앞 해상에서 항복한 후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비 류코프는 무사히 학생들과 같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가 다시 학생들을 복교시켜 주었다.93) 하지만 학생들은 학비조달이 끊겨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일부는 귀국하여 비류코프의 추천을 받아 러시아의 마산포 영사관 등에 통역관으로 취직했으나 다른 일부는 시베리아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94) 비류코프와 학생들의 활약은 러시아로부터 러일전쟁에 참전한 공을 인정을 받게 된다. 비류코프 대위는 첩보활동의 공로로 성 블라지미르(Святой Владиимр) 4급 훈장과 군도가 하사되었고, 추구예프스끼(Чугуевски) 육군 유년학교 학생 현홍탁(현홍근), 유필평(윤일평), 그리고 이르꾸츠끄 유년학교 학생 세몬한(주, 한 우경이나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세몬한이란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 다)에게는 4급 무공 메달이 수여되고 꾸르스끄(Курск) 실습학교 학생 강하탁(강 한탁)과 한기수에게는 각각 성 안나 은메달이 수여되었다.95) 그러나 아직도 한국 주 92) Пах Чен хё,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1904-1905 гг. и Корея, c.211. 93) АВПРИ, Фонд 143, Опись 491, Дело 2982, Лист 1-146, 1906년 1월 24일(2.6) 비류 코프가 외무성 제1국장에게 보낸 문서 ; 박종효,『러시아 國立文書保管所 所藏 韓國 關聯 文書 要約集』, p.246. 94) 박종효, 「관립 俄語學校 설립과 교사 비류코프의 活動(1896~1916)」,『한국근현대사 연구』46, p.23. 95) РГВИА, Фонд 846, Опись 16, Дело 1899, Лист 1-187, 1905년 10월 12일(25) 극동군 사령관 시종무관 중장 리네뷔치(Линевич Н.К.)가 흐레솨띠츠키(Хрешатицки) 장군에게 보낸 전문 ; 박종효,『러시아 國立文書保管所 所藏 韓國 關聯 文書 要約集』, p.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