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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233 5일과 6일 2일간 제12 산악포병대와 제41 동부시베리아 보병연대 중에서 3개 대 대를 방산 방향으로 지격시키기 위해 두만강을 도강해 대한제국으로 보냈다. 그 런 가운데 만주군 총사령관 쿠로파트킨도 니꼴스끄-우수리스끄(Николск-Уссур ий) 라즈돌에(Раздолье) 주둔하고 있는 제17 보병사단의 여단을 대한제국으로 급히 파견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시모프는 평화회담이 개최되었으므로 정치적 인 추이를 지켜보자고 하면서 제17 보병사단의 여단의 대한제국 파견을 보류하자 고 요청했다. 포츠머스에서의 협상이 종결된 후 파블로프 대령에게 일본 하야시 장군과 대한제국 진주군에 대한 협의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일 양국정부에 서 평화협정에 대한 비준이 끝난 뒤에 대한제국에 있는 러․일 양군 진영은 회합 하여 1905년 10월 말에 러시아군은 5일 안에 대한제국에서 철수하며 일본군은 러 시아군이 철수하는 동안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고 효령으로 후퇴해 있기로 공식적 인 합의를 보았다. 이 협정에 따라 11월 5일 제1 네르친스끼(Нерчинский) 까자 크 연대와 제9 오렌부룩스끼(Оренбурский) 까자크 연대의 2개 중대가 남 우수 리 지방에 있는 주둔지로 철수를 시작하면서 뒤를 이어 전 러시아 대한제국 진주 군이 철수하여 11월 11일 해체되었다. 그리고 14일에는 연해주 까자크 여단이 해 체되었다.78) 한편 이범윤 의병 부대와 홍범도 의병대도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일부는 국내 에 남고 300여명은 간도를 거처 러시아로 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이 해제되었다. 이 항일 의병대는 이범윤이 간도 관리사의 직위와 고종황제가 준 마 패를 소지하고 있어 러시아군과 연맹군 형식으로 가담하여 독자적인 부대로 활동 하였다. 그리고 포츠머스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항일 독립투쟁 운동을 효과 적으로 하기 위해 따로 러시아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79) 대한제국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부대들이 철수 하여 해산됨에 따라 이범윤 부대도 좀 있다가 유지비가 없어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해주 거주 한인동포의 거주지를 거점으로 이범윤과 홍범도, 그리고 러시아에 귀화한 동포 최재형 등이 항일독립 운동에 앞장서 뜻을 같이하여 블라 디보스토크 한인촌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어서 속속 국내의 애국투사인 유인석과 이상설이 합류하고 항일 빨치산 작전으로 독립투쟁의 봉화를 올렸다. 이러한 투 쟁은 새로운 국면, 새로운 형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회 각 계층에서 애국적 성 주 78) Там же, c.219. 79) 심헌용, 「조러연합군과 러일전쟁 전후 군사협력 -기원, 구상, 시도」,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