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page

군사연구 제126집 231 을 가하고, 서울 중립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18일 제물포 주둔의 임시 파견대 2개 대대도 서울에 입경, 창덕궁을 숙사를 삼았다. 19일 제12사단장 이노우에 히 카루(井上光) 중장이 도착하고, 임시 파견대의 편성을 해체함과 더불어 기병연 대․공병대대 그 밖의 부대를 합쳐 전시편성에 이행했다.72) 2월 18일, 제12사단 에 부여된 대본영훈령(大本營訓令)에 의한 임무는 평양 점령이었기 때문에, 도한 부대의 일부는 ‘북진’을 개시하고 있었지만 24일 수령된 대본영훈령에 의해 “사단 은 여러 대대로 나뉘어, 서울-의주 가도를 거쳐 평양을 향해 전진하고, 진남포에 상륙할 제1군에 합할 것”을 명령받았다. 1904년 2월 말의 제12사단 병력은 야전 사단만 19,241명, 병참부 7,301명 등 합계 26,798명이었다. 명령에 따라 제12사단 의 주력은 29일 이후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1일~18일 평양에 도착하지만, ‘한일 의정서’가 조인된 2월 23일 당시는 ‘사단은 대부분이 서울에 집합한’ 상태였고 서 울은 일본군의 완전 제압 하에 있었다.73) Ⅲ. 러시아군과 한인과의 협조 관계 1. 대한제국 진주군 창설 1905년 7월 4일 시베리아 제2보병 사단장 육군소장 아니시모프(А. Д. Анисим ов)의 지휘 하에 대한제국의 북부 및 동북부 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고 활동하던 러시아군 여러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진주군(Корейскийотряд)이 창설되 었다. 이 부대에게는 다음과 같은 선행 과제가 주어졌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 능한 한 장기간 대한제국의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어야 하며, 어떤 경우라도 일본군이 두만강 국경까지 진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과 두만강 유역 주 72) 러일전쟁 초기 일본 육군은 많은 수가 1894년~95년의 청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 는 인원들이었다. 1904년의 육군의 전투부대는 증강된 12개의 제국 경비 사단으로 구 성되었다. 각각의 사단의 주요 전력은 2개의 보병 여단이고, 각 여단은 2개의 연대로 구성되었고, 각각 3개의 대대로 구성되었다. 추가적으로 세 개의 기병대대로 구성된 기병 연대가 있고, 각각 세 개의 포병중대를 포함한 2개의 대대로 구성된 포병 연대 가 있고, 세 개의 중대로 구성된 600명 규모의 선발(先發) 공병 대대가 있었고, 그리고 세 개의 반으로 구성된 통신중대가 있었다. Alexei Ivanov 외, The Russo-Japanese War 1904-05, Oxford, Osprey, 2004, p.35. 73) 海野福壽, 정재정 역, 『한일병합사 연구』, 서울 : 논형, 2008, pp.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