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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23 560여만 달러 상당의 각종 신형 통신장비 도입계획을 수립하는 등 전쟁이후 육군 의 정비를 위한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4. 국방체제 정립기(1961∼1971) 1960년대 육군은 그동안 미군의 군사제도를 모방하여 한국군 고유의 군사제도 를 마련해나갔다. 그러던중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감으로 인해 군내 정화운동을 벌였던 청년 장교들을 주축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킴으로써 군부 가 정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후 군사정부는 반공을 국시의 최우선으로 삼아 국방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 렀고 1961년 10월 우선 국방기구를 총무과, 군무국, 정훈국, 병무국, 군수국, 관리 국과 연합참모국 등 6국 1과 체제로 개편하고, 1963년 6월 연합참모국을 합동참 모본부로 개편하였다. 한편, 북한은 휴전 후에도 적화통일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1962년도 소위 4대 군사 기본노선을 내걸고 군사력 증강에 온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간첩과 무장공 비를 침투시켜 남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전략을 끊임없이 구사해 왔다. 이와 같은 북한의 침략 도발은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한 북한 특수부대 김신조 일당이 침투함으로써 정점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창설된 것이 바로 향토예비군 (鄕土豫備軍)이었다. 광활한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는 무장공비에 대처하기 위해 박 정희 대통령은 1968년 2월 7일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하겠다 고 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향토예비군의 창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년 2월 28일에 향토예비군 설치법 시행령이 제정 공포되고,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 에서 창설식을 거행함으로써 향토예비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예비군의 창설로 육 군은 유사시 즉각적인 예비전력의 극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수도방위사령부를 창설함과 더불어 동해안 경비사령부 및 제1ㆍ2유격여단 을 창설하여 북한의 침투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ROTC 제도를 신설, 제2ㆍ3사관학교 및 종합행정학교 창설, 병무청 신설 등 육군의 제도 를 정비하였다. 1971년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에 따른 서부전선 지역의 방어력 보강과 한․미 제1군단의 임무종결에 대비하여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용인에서 제3군사령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