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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227 러시아와의 전투가 개시되면 곧 자국 군대가 바로 대한제국과 만주 영토에 상륙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서울(漢陽, 지금의 서울)의 일본 공사 하야시는, ‘현재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불가피한 전쟁이라는 극단적 방법에 매달 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대한제국의 외무부 대변인에게 단언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이 두 불꽃-러시아와 일본-의 사이 위치에 있으므로 일본 정부의 보호 통치 제안에 동의해야만 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예 언은 아직 들어맞지 않고 있었다. 1903년 11월 고종은 자신의 시종 무관 현상근 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할 친서와 함께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파견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대한제국의 사절을 반갑게 맞았으며, 그를 통하여 러 시아는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보장할 것이고, 이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사실을 고종에게 전달하였다.54) 일본이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던 현상건은 1904년 1월 11일 러시아 함대 바랴 크호 편으로 제물포로 귀국하여 열차로 서울에 들어왔다.55) 중립보장을 얻어내려 고 러시아에 파견되었던 현상근이 귀국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전시 국외중립안과 한․일 비밀공수 동맹안이 팽팽히 맞서 나갔다. 이에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는 이 른바 중립파들이 대한제국 황실․정부당국․러시아공사 등과 연계하여 중립화를 성사시키는 일이 없는지 각종 정보를 입수하면서 그 동태파악에 주력하였다. 그 러나 이러한 일본공사도 끝내 대한제국정부가 국외중립을 선언하리라고는 생각조 차 못하였고 그러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56) 정부차원의 중립선언은 이렇게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전시 국외중립 선언을 국제적으로 공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반도의 전신업무가 이미 일본의 실질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었으며 왕궁내부에까지 일본 첩자가 많 이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 발표 직전까지의 보안유지가 어렵고 외부의 방해공작도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의 직접 명령을 받은 특사가 해외에 나가 기습적 으로 각 국에 타전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던 바, 이것이 곧 1904년 1월 21일 자로 발표된 중국의 ‘지부(芝罘) 선언’이었다.57) 주 54) Пах Чен хё,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1904-1905 гг. и корея, с.149. 55)『日本外交文書』37권 1책, 事項 4, 「韓國中立聲明關係一件」, 330 韓帝密使玄尙健歸 國ノ件, p.310. 56) 최영희, 「露日戰爭前의 韓日秘密條約에 對하여」,『白山學報』3, 서울 : 백산학회, 1967, pp.479~480. 57) 박희호, 『舊韓末 韓半島 中立化論 硏究』, 서울 : 동국대학교, 1997,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