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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러 ․ 일전쟁기 러시아군과 한인과의 관계 연구 224 군사연구 제126집 을 구축하게 되어 러․일 간에 세력의 균형이 흔들리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운 명은 풍전등화가 되어갔다. 이즈음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을 이유로 해서 만주에 큰 병력을 보내고 사실상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의 철병을 일본도 여러 번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 에, 1903년 4월 8일에는 철병을 약속한다고 러시아 측이 언명했었다. 그런데 러 시아는 이 약속을 실행하지 않고 반대로 봉천과 영구(營口)지역에 군대를 증강 했다. 1903년 6월 23일 일본은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러시아와의 담판에 대한 국 시를 결정했다. 이 결의안은 따로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러시아가 협약을 위배해서 만주, 특히 요서(遼西)의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 기회를 이 용해서 수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대한제국 문제를 차제에 해결할 것, 이 문제 를 결정하기에 앞서 우선 대한제국은 여하한 사정이 있더라도 러시아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 그 대신 만주에서는 이미 러시아가 우세한 위치에 있으므로 다소는 양보할 것. 담판은 동경에서 개최할 것.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서라도 대한제국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것 등이 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이러한 강경한 태도의 배후에는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대항할 수 없는 일본이 새로이 영국의 후원을 얻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대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46) 일본 측에서 보면 영일동맹은 현대에 이르러 서방 강대국과 동양의 한나라가 대등한 위치에서 체결했던 첫 번째 조약이었고, 일본이 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 움하는 토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 조약을 바탕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대한제국에서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필수적 조치들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47) 그러나 대한제국 측에서 보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강화한 것이다. 한편 영일동맹 이후에도 일본은 주로 대한제국 문제와 만주 문제에 대한 전반 적인 이해를 위한 협상의 대상으로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한 해결을 시도한다. 일 본이 러시아와의 교섭개시를 결정한 것은 6월 23일의 어전회의에서였다. 곧 이어 이와 같은 조치를 개시하려는 의도와 내용을 영국정부에 통보하였고, 7월 28일에 는 고무라 외상은 러시아 주재 일본 공사 구리노로 하여금 자국의 의도를 람스도 르프(В.Н.Ламздорф) 외상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8월 12일에 구리노는 일본의 제 주 46) 山辺健太郞, 안병무 역,『한일합병사』, 서울 : 범우사, 1982, pp.183~186. 47) 한국정치외교사학회,『한국외교사 Ⅰ』, 서울 : 집문당, 1993,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