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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특 집 Ⅰ 육군 60년발전사 발간과 활용방안 22 군사연구 제126집 당연한 결과로 개전 초기 북한의 기습과 상대적 전력의 심각한 불균형속에서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육군은 급파된 UN군과 함께 지연전을 수행하며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시켜 한ㆍ만 국경선상에 있는 초산과 혜산진까지 진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러나 예기치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지루하고 치열한 고지쟁탈전의 공방전을 벌이던 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3)이 조인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은 일단 종 지부를 찍게 되었다. 한편, 전쟁기간 중 육군은 부대확장에도 주력하여 전쟁발발 당시 8개 사단에 불과하였던 병력이 정전협정 조인 당시에는 3개군단 18개 사단 규모로 확충되는 성과가 있었다. 휴전이후 1954년에 체결된 한ㆍ미 의정서에 명시된 국군의 규모는 72만 명이었 으나 미국의 삭감 제안으로 1959년 63만 명으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된 조건에 따라 육군도 2개 사단을 해체하는 한편, 전력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포병증 편을 비롯하여 군 현대화를 위한 신장비의 도입, 이에 따른 군구조의 정비, 부대 통ㆍ폐합 및 재배치 등을 추진함으로써, 전쟁을 거쳐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혼란 한 가운데 팽창일로에 있었던 병력을 편성 및 인사제도 면에서 재정비하는 계기 를 만들었다. 하지만 감군 조치는 미국의 대한(對韓)원조가 줄어든 결과로 인한 것이었으며, 2개 사단의 해체로 예비병력의 1/3의 상실을 가져와 방어임무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1959년 1월 1일 육군은 육군본부 직제를 참모부장 제도로 바꾸어 참모업무를 사업별로 통합 지휘할 수 있게 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교육총본부에 예속되었 던 각 병과학교 중 전투병과를 제외한 행정 및 기술병과학교, 여군훈련소 등을 육본 직할로 예속시켜 해당 병과장(兵科長)에게 교육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병과 실정에 부합된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60년 5월에는 교육 총본부 를 해체하고 6월 1일 교육사령부를 창설하여 보병ㆍ포병ㆍ기갑ㆍ화학ㆍ항공학교 를 여기에 예속시켰다. 한편 전력증강을 위해 육군은 신형 2 1/2톤 디젤 차량 4,700여 대를 도입하여 구형차량과 교체하였으며, M-36형 전차를 M-47형 전차로 교체하기 위한 계획과 주 3)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 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협정문은 영문․한글․한문으로 작성되었고 내용은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