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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215 비용이 15억엔이 소비되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11만 5천명의 인명손실과 98척의 함정손실, 그리고 전쟁비용이 무려 22억엔이 소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2) 러일전쟁을 보는 시각은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13)와 일본, 그리고 배후 관련 국 가들의 이해가 서로 상반 되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원인이 마치 대한제 국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처럼 상대편을 비난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러시아의 전술과 무 기는 낡았고 정보체계는 빈약했으며 지도층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14) 하지만 러 시아는 대한제국문제로 협상 중에 일본 함대가 선전포고 없이 제물포와 여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고 분개했다. 이것을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했고, 거 기에 굴복하지 않은 러시아 장병의 대응자세와 희생정신을 오히려 높이 평가했 다. 초기 제물포 해전을 예로 든다면, 러시아는 두 척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 하고 일본의 열여섯 척을 상대로 양보 없는 결전에 임했기 때문에 ‘용감한 방어 전’이라는 것이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여러분이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는 우리 러시아 함대의 역사에 새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치하하고, 두 군함의 이름은 영 일본의 예비 전투함으로는 Nisshin과 Kasuga 2척의 장갑순양함만이 싱가포르에 정박 해 있었다. Dennis Warner 외, The Tide at Sunrise : A History of the Russo-Japanese War, 1904-05, London, Routledge, 1974, p.18. 참모진들의 탁월한 수준과 전술적 능력은 주로 프러시아의 육군과 영국의 해군제도에 서 배운 것들이었다. 모든 일본군 장교들은 모국어 외에 적어도 다른 하나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이 계속한 투자의 결과였다.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p.297. 12) 김행복 외, 『20世紀 地球村 戰爭』, 서울, 병학사, 1996. p.124. 13) 제정러시아 시기에는 러일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 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러일전쟁에 관한 공식역사를 정리하 는 일이었다. 따라서 육군성과 해군성은 각각 관련 소위원회를 설치하여 자료를 수집 하여 발간했고 이를 토대로 러일전쟁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시도하였다. 이 이외에도 전쟁에 직접 참가한 많은 사람의 회고록과 함께 러일전쟁에 관한 여러 단체 또는 개 인들의 연구서도 등장하였다. 소비에트 시기에는 제정러시아 시기의 자료집뿐 아니라 문서보관소 자료 등을 바탕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저술이 진행되었다. 이때는 전쟁의 원인이 집중연구 되었다. 러시아 시기에는 구체적으로 러일전쟁에 참여한 인물 연구 뿐만 아니라 군부와 해군부 등 당시 정부기관에 대한 정책연구가 진행되었다. 정부기 관의 정책에 대한 연구는 러일전쟁의 원인과 패배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김영수,「러시아, 러일전쟁 패배를 보는 두 시각」,『역사비평』 69, 서울, 역사 와 비평사, 2004. 14) Richard M. Connaughton, The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 a military history of the Russo- Japanese war, London, Routledge, 1988,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