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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79 정유년 2월부터 칠천량 해전직전까지 왜군은 남해안의 부산포, 거제도, 여수일 대와 동해쪽의 서생포에 침략을 하여 상륙과 동시에 한양으로의 진격을 꾀한다. 남해안과 서생포는 지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남해안으로 상륙하여 평야와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서생포에 상륙하여 산악구릉지대 영남지역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따라서 왜 군은 조선수군의 해상 차단선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해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서생포에서 양공부대를 운용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왜군은 수륙병진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상륙할 때와 상륙이후 육지에서의 진격 을 고려했을 때 최종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의 힘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도 주력부대와 양공부대 로 운용한 것으로서, 해두보 확보시에 수군을 주력부대로, 연안의 매복부대로 운 용중인 왜육군을 양공부대로 운용하였다. 결국 왜군의 입장에서는 수군과 육군을 모두 운용하여 조선 軍을 혼란과 기만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왜군만 수륙병진 전술을 구상한 것만은 아니다. 원균이 주장한 전술에 서도 수륙병진전략, 즉 양공작전을 찾아 볼 수 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후 3월 29일 장계에 ‘안골포와 가덕도 등의 왜군 세력이 약하므로 육군이 먼저 이 지역 을 공격하면 수군이 왜군을 섬멸할 수 있다’는 수륙병진 전술을 주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의 의견이 타당성은 있으나 두 곳이 해안 깊숙이 위치하여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는 의견을 올렸다. 곧이어 비변사22)는 도원수의 의견을 들어 수군으로 하여금 부산 앞 바다를 왕래하게 하면서 왜군이 자유롭게 도해하는 것을 저지해야 된다는 해로차단 전술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에도 원균은 5월말에 장계를 올려 수륙병진 전술을 재차 주장하면서 ‘부산 앞 바 다는 함대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고 앞뒤로 왜군에 포위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 하였다. 이 때 비변사는 도원수 등의 해로차단 전술과 통제사의 수륙병진 전술의 차이를 인식했지만, 결국 군사결정권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므로 그들의 판 단에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요컨대, 수륙병진 전술은 통제사 원균 홀로 주장한 것이고, 해로차단 전술은 조 정 신료들 뿐 아니라 선조까지도 동조한 것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도체찰사 이 원익은 수군을 반으로 나누어 한편은 한산도에 머물도록 하고, 나머지 반으로 해 주 22) 중종 때부터 국방문제를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방문제만이 아니 라 의정부 기능인 일반 정무까지도 합좌의결 형식으로 관장하는 기관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