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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손자병법의 詭道로 본 칠천량 해전 연구 172 군사연구 제126집 는 원균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도원수 명령대로 세력을 나누어 다른 한쪽 함대만 출동하였다. 이 때 조선수군은 7월 8일 소규모 전투에서 왜군의 군선 10여 척을 격파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백 척에 이르는 왜군의 대군선을 만났고, 이 때 왜군 은 조선수군과의 전면전을 회피하는 신중한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수군 역시 왜 군선이 대규모였기 때문에 더 이상 확전하지 않고 일단 물러났다. 그런데, 이때 풍랑이 일어 일부 전선들이 표류하였고, 그중 5척은 두모포에 또 다른 7척은 서생포에 표착하였다. 특히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수군들은 상륙을 시 도하다가 주변의 왜군에게 전멸 당했다. 이와 같이 원균은 6월 18일 이후 7월초까 지 상부 지시대로 함대를 나누어 부산 앞 바다까지 왕래하면서 몇 차례 해전을 벌여 소소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조선수군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칠천량 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 출전을 종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원균 대신 휘하 군관이 곤장을 맞 은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미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감사에게 곤장을 맞은 사건이 있었던 점과, 도원수가 곤양으로 가서 통제사를 소환했던 것으로 볼 때 원균이 곤장을 맞은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된다.12)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를 장벌한 것은 도체찰사와 군무를 총괄하되 수군의 절제 권한을 법대로 시행하라는 조정의 지시 와 함께 원균을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칠천량 해전은 원균 장벌사건 직후인 7월 14일에 통제사가 함대 전체 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원균 함대는 이날 새벽부터 출항하여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한 후 왜군과 해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계속 회피하는 전술 을 펼쳐 원균 함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 후 원균 함대는 왜군을 추격하여 부산 앞 바다를 지나 전선의 운용이 어려운 지점까지 이르렀는데, 풍랑 때문에 일부가 표류하여 흩어졌다. 원균이 함대를 겨우 수습하고 회항하여 정박하기 위해 가덕 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저물 무렵부터 날씨가 나빠지면서 항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일부가 표류해 갔을 뿐 아니라 정박지 에 도착한 함대병력은 피로에 지쳤고 이런 상황 때문에 가덕도에 도착하자마자 각 전선은 기갈(飢渴) 때문에 물을 구하려고 서둘러 상륙하였다. 그러나 가덕도에 는 다카하시 나오쓰구 등이 이끄는 왜군 육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수 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약 4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원균 주 12)『선조실록』권 94, 선조 30년 11월 사헌부가 권율을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을 엄장으로 독촉하여 수군이 패망했다’고 탄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