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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71 2. 칠천량 해전 경과 원균이 수군통제사로 부임한 것은 1597년 2월 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강화교섭 기에 이순신이 수군 전력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결과는 이때까지 군량미와 화기 등 군수품 확보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병력 충 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조정에서는 경상․전라도 공․사천을 모두 수군에 편입시키고, 제석산성에 들어가기로 한 병력 5천여 명 중 일부를 징발키로 결정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이 발 생하기 직전까지 징발인원이 1천여 명 미만이었다. 징발된 병력은 대부분 연해 지역의 농어민이거나 상인이었으므로 전투경험이 없었고, 이 때문에 해전에 투입 하려면 해상훈련이 필요했다. 당시 훈련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징발된 후 곧바로 각 전선에 배치되어 해전에 필요한 적응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10) 이와 같이 정유재란 직전에 급조된 수군은 전 투경험과 훈련이 부족했고, 또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효율적인 지휘체계를 보유하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시 출동경과는 6월 29일에 올라온 도체찰사 이원익의 전황 보고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원균의 휘하 함대는 6월 19일 안골포와 가덕도에 서 소규모 해전을 치렀는데, 안골포에서 왜군 군선 2척을 빼앗고 가덕도에서도 추격전 끝에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하였다. 그런데, 이 날 전투를 마치고 회항하려 할 때에 안골포의 왜군이 역습을 감행하여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왜군은 조선수군 후미를 둘러싸거나 좌우를 협공하면서 탄환을 난사하였다. 격렬한 전투 중에 평산만호 김축은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군수 안홍국은 머리에 탄환 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날 해전을 패전이었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장수 1명이 전 사하고 1명이 부상당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원균함대는 일단 후퇴했 다. 그러나 원균은 선조와 비변사의 출전 명령을 계속해서 종용받게 된다. 칠천량 해전의 두 번째 출동은 7월 4~5일 사이에 시작되었다.11) 이번 출동에 주 10) 『조선실록』권 89, 선조 30년 6월 10일의 狀啓에서 도체찰사는 ‘이때까지 수군이 한번 도 해양에 나가지 않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때까지 수군의 출동 준비가 덜 된 상 황과 훈련 중이었음을 추정케 하는 사실이다. 11) 『선조실록』권 90, 선조 30년 7월 8일 왜군측의 600여 척이 부산에 도착한 사실과 그 전날 우리 함대가 다대포 앞에 정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산도 를 출발한 것은 2∼3일 전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