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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69 보고를 통해서 조정에 전해진 후 조정에서는 긴급대책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 하였는데, 이날 논의 가운데 선조는 왜군 군선이 과연 대형화했는지 질문하고 이 를 확인했다고 기록된 것은 왜군이 강화교섭기 동안 아다케(安宅船)와 같은 대형 군선을 많이 건조했던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 조기경보 및 감시체계 모방을 들 수 있다. 임란 초기에 이순신은 상대의 虛, 實, 强, 弱을 파악하기 위하여 주요 길목 및 적지에 정탐병을 운용하여 항상 준비된 상태로 전투에 임했다. 이를 모방하여 왜군은 칠천량을 비롯한 주요연안 을 정찰 후 육군 매복부대를 사전 배치하며, 칠천량 해전 7월 16일 새벽에 원균 의 함대에 은밀히 접근하기 위해 소규모 정찰 및 선견대를 운용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초기 패전에 대한 그들의 대비 및 보완책으로 분석할 수 있다. 넷째, 조직적인 수륙합동작전을 들 수 있다. 바다와 육지 모두를 극복해야 하는 왜군으로서는 수군과 육군의 협조된 작전이 더욱 필요했다. 임란 초기에도 수륙 합동작전이 있었지만 조직적이지 못했으며, 특히 이순신에 의한 수군의 연패는 합동작전의 중요성을 더욱 필요로 했다. 정유년 왜군은 남해안의 주요연안에 육 군매복부대를 운용하여 해상에서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의 잔적격멸, 도주 및 보 급로 차단 등으로 조직적인 수륙합동작전을 꾀했다. 정유년 7월 칠천량에서 해상 에서의 격멸뿐만 아니라 주변 연안으로 조선 수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일시 에 공격하는 조직적인 수륙합동작전은 그들의 재침략을 위한 발전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조선수군의 재정비에 대해서 알아보자. 강화교섭이 진행 중이던 선조 27년(1594년) 9월, 조선에 주둔했던 명나라 유정의 부대는 모두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남해안 일대에는 아직까지도 왜구의 위협이 존재하고 있어서 조선 조정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방안대책 강구에 골몰하고 있었고 왜군의 재침략에 대비하 는 전략과 정비가 필요했다. 1596년 11월 6일, 왜군이 재침할 것이라는 첩보가 확인되었고, 수군 주력의 침 입목표는 전라도이며, 수륙병진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것까지 밝혀졌기 때문에 조 선 조정은 재침에 대한 방어대책으로 각 지역의 거점 산성을 중심으로 한 ‘청야 전술(淸野戰術)’과 수군을 이용한 ‘해로차단 전술’ 두 가지를 수립하였다.7) 청야전 술이란 침입이 예상되는 지역의 주민과 식량 등 물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적에게 주 7) 이장희,『山城修築과 堅壁淸野, 임진왜란사 연구』(아세아문화사, 1999). pp.288∼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