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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39 네루 사이의 서신교환으로 이어져 1960년 4월 19일 양 지도자간의 회담이 개최되 어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두 번의 충돌은 그 경위와 분쟁지역에 대한 영 토주권과 관련, 양국의 주장이 확연히 달라 본격적으로 양국이 국경문제를 둘러 싼 주도권 싸움에 더욱 휘말려 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60년 4월 뉴델리 국경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중국으로서는 서부지역 내 약 25,900㎢의 무거주 지역에 대한 현 통제권을 인정한다면 동부지역의 98,420㎢에 달하는 영토를 인도의 소유로 인정하겠다는 현상 유지안을 인도측에 제안하였 다.39) 이에 대해 인도측은 두 지역에 대한 인도의 권리는 명백한 것이므로 어느 한 곳도 양보할 수 없다는 반대의사를 표했다.40) 1960년부터 인도의 분쟁지역으로의 전진정책에 따라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중국은 1961년 11월 2일과 30일 중국 영토 내에서의 인도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강력한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라다크 지역에 대한 현상유지를 인도측이 존중하지 않는다면 동부지역에서 분쟁발발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41) 이와 같은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1962년 8월말까지 탁라능선에 약 40개의 인도군 주둔 지를 설치하는 등 군사행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중국의 경고와 현상유지 제의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분쟁지역에 서의 군사행위를 지속했다. 중국은 지속된 국경지역 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동 지 역으로의 군사행위 저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인도로의 군사개입을 결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주 39) 티베트에 대한 지배권 장악을 원하는 중국 입장에서 중국과 티베트의 교통로 확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직선로는 지형이 험준하고 겨울에는 통행이 거의 불 가능했기 때문에 중국은 우회도로로 신장(新疆)에서 티베트 북서쪽을 지나 악사이 친 을 관통하여 티베트의 북부로 들어서는 길을 확보하는 것을 국경획정의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삼고 있었다 : Wlliam J. Barnds, Pakistan and the Great Powers (New York : Praeger Pulishers, 1972), p.150. 40) 앞의 책, p.154. 41) 인도의 전진정책과 중국의 중인분쟁에서의 입장과 관련해서 기존의 신인도적 입장에 서 탈피하여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중국의 입장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이 방면에 새로운 연구를 이룬 India's China War를 들 수 있다. 맥스웰은 인도정부가 1, 2차 충돌에서의 중국의 호전성을 비난하면서도 전진정책을 추진 중인 인도군에 대한 중국군의 무력사용이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는 점은 실제로는 인도군이 1, 2차 충돌에 서 선제공격을 했음으로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 Neville Maxwell, India's China War, pp.171~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