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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35 이후 9월 30일 저우언라이는 미국 정부를 겨냥해 외국의 중국 침략 불가와 미 국의 북한 침략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또 10월 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할 것이라는 전문을 발송했다. 이어 3 일 저우언라이는 인도대사를 통해 중국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28) 그러나 중국 의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10월 7일 유엔과 한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 했으며, 1950년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조선으로의 출병과 작 전개시 명령을 발표,29) 10월 25일부터 이른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 개 시되었다.30)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중 충돌, 특히 미국의 타이완 해협으로의 7함대 파견 은 중국 국가안위의 위협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 전쟁에 군사개입을 단행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3) 북한 지원 필요 및 국경지역 안정추구 북한은 남침을 계획한 당사자로 중국의 지원을 받은 직접적인 대상국이었 다. 앞서 언급한 중국 내부 정황과 소련의 지원 필요성의 선상에서 본다면, 중국 은 소련의 강력한 권유 내지는 압력으로 북한을 지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 나 여기에서는 소련 요소를 배제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서 중국이 군사개입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1930년대에 있었던 중국의 항일투쟁 및 전쟁에 참가한 조선족 병사들은 상당수 에 달했다.31) 이를 통해 1930년대 항일전쟁의 무대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만주도 주 28) 미국군대는 38도선을 넘어 전쟁을 확대할 기도를 하고 있다. 만약 미국군이 이처럼 행 동한다면 중국은 좌시하지 않고 관여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 문제가 반드시 평화적으 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전쟁은 중단되어야 하며 조선에 침략한 부대는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앞의 책, p.7. 29)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中國人民志愿軍 抗美援助戰爭』(北京 : 軍事科學出版社, 1990), pp.10~11. 30)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앞의 책,『中國人民志愿軍 抗美援助戰爭』(北京 : 軍事科學 出版社, 1990), p.19 : 중국은 1950년 10월 25일을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했다. 31) 당시 연변지역에서 전사한 조선족은 연길시 512명, 도문시 185명, 용정현 809명, 왕청 현 531명, 훈춘현 353명 등 2,769명에 달했다. 중공 연변주위 당사 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자료집』(연변 : 연변인민출판사, 1989), pp.87~209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 (서울 : 나남출판, 1996), p.236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