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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33 입하고19) 경제 재건과 탈피와 생산증대를 위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가시적 인 성과 없이 경제적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더불어 경제재건에 필요한 자본과 기 술의 제공처를 소련으로 삼고 1949년 6월 30일, 최종적으로 대소일변도 정책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 1950년 2월 14일 양국간에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20)이 체결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한국전쟁으로의 개입은 신생 중국이 직면한 경제 재건을 위해 소련의 원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동안 소련이 중 국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을 없애기 위한 결정으로 볼 수 있다. 2)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 방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원인은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데 이는 중국이 한국전쟁의 명칭을 시기별로 나누어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1950년 10월 25일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은 ‘한반도 내전’이라 명하였으며 이후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였을 때는 ‘미국의 한 반도 침략’이라 규정하였고, 중국이 참전한 후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21)이 라고 칭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은 한국전으로의 중국군 참전 목적을 ‘미국에 대한 대항’에 두고 있었다. 물론 이는 전쟁발발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전후 중국 의 입장을 최대한 발휘한 해석일 수 있으나, 중국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해석하든 지 간에 중국의 군사개입 결정요인을 찾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의 대미 인식을 분 석해 볼 필요가 있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중국에게 유화적 태도를 보 였다. 미국은 중국이 타이완을 공격하더라도 장제스를 돕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 확히 하였으며, 한반도와 타이완을 그들의 방위선에서 제외시켰다. 미국은 1946년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전쟁 발발 후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인도 주 19) John Gittings, The Role of the Chinese Army (London : Oxford Univ. Press, 1967), p.27. 20) 沈志華, 『毛澤東․斯大林与朝鮮戰爭』(廣東 : 廣東人民出版社, 2003), pp.148~150 : 선 쯔화는 중․소동맹이 양국의 정치와 군사상에 매우 유익한 것이었으나 경제와 외교의 측면에서 서로의 이익이 달랐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스탈린이 동 조약을 체결함으 로써 아시아에서의 전략목표인 태평양 수출항과 부동항 획득을 실현하려 했다고 주장 했다. 21)『建國以來毛澤東文稿』,(北京 : 中央文獻出版社, 1987), 第1冊, p.556, 하도형, 앞의 글, p.260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