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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22 군사연구 제126집 남한산성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청군의 남한산성 공격이 아닌 청 군의 강화도 점령이었다. 1637년 1월 26일, 청군측은 그들이 1월 22일 강화도를 함락하고 그 곳에 있던 비빈, 왕자, 종실, 백관 및 가족들을 포로로 하였다는 사실을 통보하면서 조선 국 왕의 출성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남한산 성에 강화도 함락과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산성을 방어하 던 백관과 군민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 축조된 수항 단(受降檀)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 분 석 임진왜란 초기에 전투준비가 전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왜군의 침공을 받았다 면 남한산성 농성전은 어느 정도 전투준비가 된 상태에서 청군의 기습적인 속도 와 공격작전에 허(虛)를 찔린 전투였다 할 수 있다. 당시의 청군은 조선 도처의 방비된 성(城)을 소수병력으로 견제하고 기병위주 의 선봉대로 신속히 한성 도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즉, 기습이란 상대방이 모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예상치 못한 시기 에 공격을 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조는 애초에 계획된 강화도로 이동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제한된 병 력과 1달치 정도밖에 안 되는 양곡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에 접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근왕병마저 적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연결작전을 시도했더라면 좀 더 상황은 호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 지휘관의 자질 부족, 근왕병의 훈련부족, 제한된 전투근무지원 등으로 인해 적극적인 연결작전을 구사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포위된 부대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더욱 가중하여 받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강화도로 양분되어 비빈과 왕실 등이 포로로 잡힘으로 인해 항복할 수밖에 없는 삼전도의 역사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농성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투원들의 고도의 훈련, 충분한 전투근무 지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려는 전투의지 그리고 이들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 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