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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20 군사연구 제126집 12월 29일 청군의 계략임을 간파하지 못한 도체찰사 김류는 여러 장수들의 만 류와 주저하는 장병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출격명령을 내린다. 최초 100여 명 의 조선군은 조심스럽게 청군 진영에 접근하였으나 청군의 반응이 없자 후속하던 200여 명의 조선군과 함께 앞을 다투어 포로와 우마를 거두고 있을 때, 매복해 있던 청군은 조선군을 협격하기 시작한다. 김류의 고집으로 충분한 양의 화약도 지참하지 못한 조선군은 힘이 센 수십 명의 장병만이 살아서 돌아오고 나머지는 전사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만다. 더구나 12월 30일 청 태종 휘하의 본군까지 합세함으로써 남한산성 밖의 청군 포위망은 더욱 강화되었으나 성 안의 사정은 많은 수의 군마(軍馬)가 굶어 죽거 나 서로 꼬리를 뜯어먹기까지 하는 참상이 빚어지고 죽은 군마의 고기를 병사들 에게 지급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12월 말부터는 식량 배급을 줄여야 했 고 노천에서 기거하는 병사들은 동상에 걸려 얼굴색이 검푸르게 변색되고 손발이 찢어지거나 썩기도 했다. 남한산성에도 병자년(1636년)이 가고 정축년(1637년)이 찾아왔다. 1월 3일 한성 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도 한성은 물론 인근지역까지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고 청의 우익군이 강화도를 압박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정축년에 들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청군은 1월 11일 헌릉에 배치된 본군 제2군의 일부와 단대리에 배치된 좌익군 제3군의 병력 7천명을 수원, 용인 방면으로 진출시키고, 탄천 일대의 본군 제4군 6천명을 여주, 이천 방면으로 진출 시켜 근왕군의 남한산성 지원을 봉쇄하고 포위병력을 강화하였다. 이는 분명 조 선군에 대한 무력시위를 겸한 병력이동으로 산성 안 조선군의 전의를 꺾어 항복 을 유도하려는 청군의 압박전술이었다. 1월 18일 북문 수비 조선군 20여 명이 출 성하여 청군 6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병기와 마필을 노획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 으로 1월 19일 청군은 500여 기의 기병으로 서문을 공격하였고 밤에는 수백 명을 동원하여 동문을 기습 공격하였다. 성벽에 운제를 걸고 청군이 성안에 들어와 한 때 고전했으나, 어영별장 이기축(李起築)이 전열을 가다듬고 진두지휘하여 성 안 에 들어온 청군에 역습을 가하여 청군을 물리쳤다. 1월 20일과 23일에도 청군을 급습하여 청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출성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3일 밤에는 서문을 공격하는 청군의 공격을 맞아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의 진두지휘 아래 청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1월 24일과 25일에는 청군 수백 명이 산성 동문과 남문